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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영화 '그때 그 사람들' 다큐 장면 삭제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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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조건부 상영 결정은 법원이 표현.예술의 자유와 인격권(명예)의 충돌 사이에서 절충안을 내놓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사건에서 박지만씨가 문제삼은 부분은 ▶비밀 요정에서 반라의 여인들이 등장하는 장면▶청와대 집무실과 궁정동 별관 만찬장에서 '각하'의 일본어 사용▶'각하'가 집무실에서 일본 가요를 잘 부르는 가수 '수봉'을 만찬장으로 부르도록 한 장면 등이다.

재판부는 이 장면들이 다소 과장되고 비유가 신랄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유족들의 인격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표현의 자유 범위 안에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이 영화가 ▶허구에 기초한 블랙 코미디며▶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면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10.26 사건의 재조명이 어렵고▶박 전 대통령이 공적(公的) 인물이므로 어느 정도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되더라도 유족들이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재판부는 허구에 기초한 영화에 박 전 대통령 시절 발생한 시위 장면과 장례식 장면 등 다큐멘터리 장면이 그대로 포함될 경우 관객들이 영화 속의 인물을 실제 인물(박 전 대통령)과 동일시하게 되고 이 영화가 허구라는 사실을 잊은 채 실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는 인상을 가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즉 사실과 허구의 구분이 모호해져 결과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인격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문제의 장면들이 작품의 완성도나 흐름상 필수불가결하다고 보기 어렵다"며 해당 장면을 삭제해도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지만씨가 요구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일 경우 영화사 측이 창작물을 관객에게 공개할 기회 자체가 봉쇄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 결정에 대해 박지만씨는 "창작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존중돼야 하지만 사실과 거짓을 뒤섞어 혼동시키는 일은 곤란하다"면서도 "재판부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수용 의사를 밝혔다.

?영화계 및 제작사 반발=영화인들은 법원의 결정에 대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개봉을 사흘 앞두고 법원이 조건부 상영 결정을 내리자 "이번 결정이 영화에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지난해 '실미도'의 경우 상영 기간 중에 북파공작원 훈련병 유족 등이 사자(死者) 명예훼손을 이유로 비디오.해외판매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이 영화 제작사인 MK픽처스의 심재명 프로듀서는 "영화를 삭제.왜곡해 관객에게 선보인다는 것은 창작자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일"이라며 "그러나 총 102분의 상영시간 중 법원이 삭제를 요구한 3분50초 분량을 검은색 화면으로 처리해 개봉한 뒤 법적 절차를 밟아 온전한 영화를 상영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호.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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