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집값 약세-주식값 강세’ 90년대 초·중반과 닮은꼴, ‘나 홀로 상승’ 오래 못 갈듯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81호 24면

집과 주식은 재테크의 양대 축이다. 경기가 좋으면 대개 집값과 주식값은 같이 오르고 경기가 나쁘면 같이 떨어진다. 1997~98년 외환위기로 집값과 주식값이 폭락했다가 위기가 진정되자 동반 급등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올해는 집값과 주식값이 완전히 따로 움직이고 있다. 주택시장에선 불황의 골이 깊어져만 간다. 일부 지역에선 급매물도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반면 주식시장은 상대적으로 호황이다. 코스피지수는 지난해 11월 27일 바닥을 치고 9개월 동안 200포인트가량 올랐다. 이달 초에는 1790선을 넘어서며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최근 며칠 새 미국발 악재로 주춤하긴 했어도 지수 1700선은 무리 없이 방어하는 분위기다.

따로 노는 집값과 주식값, 25년 흐름 분석해보니

중앙SUNDAY는 한국거래소와 국민은행 부동산조사팀에서 자료를 받아 86년 이후 25년간 집값과 주식값의 흐름을 분석했다. 집값은 국민은행이 조사한 서울 지역 아파트 매매가격 지수, 주식값은 유가증권 시장의 코스피지수(옛 종합주가지수)를 사용했다. 분석 기간은 5년씩 다섯 개의 국면으로 나눴다. 각 국면이 시작하는 시점의 집값과 주식값을 각각 100으로 보고 이후 5년간 움직임을 그래프로 비교했다.

역사적으로 집값과 주식값이 같이 오르고 떨어지는 동조화보다는 따로 움직이는 차별화가 더 많았다. 특히 최근의 집값 약세, 주식값 강세는 90년대 초·중반과 많이 닮았다. 당시 주택 200만 호 건설이란 ‘물량 폭탄’은 90년대 중반까지 수도권 집값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여윳돈을 가진 사람들은 일제히 주식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코스피지수는 사상 두 번째로 1000선을 돌파하는 초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주식시장의 ‘나 홀로’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는 29일 부동산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논란이 됐던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는 실수요자에 한해 완화하고 ▶다주택자에게 양도소득세를 무겁게 물리는 제도의 시행을 늦추고 ▶보금자리주택의 공급 물량을 시장 상황에 따라 조절하는 내용 등이 담길 전망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미 4월에도 ‘주택 미분양 해소 및 거래 활성화 방안’을 내놨지만 주택시장의 침체를 막진 못했다. 4개월 만에 다시 나오는 부동산 대책이 집값 약세, 주식값 강세의 시장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씨티프라이빗뱅크 김일수 부동산팀장은 “8·29 부동산 대책의 구체적 내용은 ‘뚜껑’을 열어봐야 하겠지만 침체된 시장을 금세 되살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미국 주택거래 실적이 15년 만에 최악을 기록하는 등 해외 요인도 부정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2~3개월 뒤 시장 상황에 따라 추가 대책이 나올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내다봤다.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증시가 사람으로 치면 기초체력이 떨어진 상태라며 나 홀로 강세를 오래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1 1986~1990년
3저 호황과 88올림픽 호재
주가 1000선 돌파 후 급락
집값은 옆걸음 하다 급등

88서울올림픽을 한 달여 앞둔 88년 8월 10일. 노태우 대통령은 나웅배 경제 부총리, 사공일 재무장관, 최동섭 건설장관 등을 청와대로 불러 취임 후 첫 경제동향보고회의를 주재했다. 이날 회의의 핵심은 ‘부동산 투기 근절대책’이었다. 노 대통령은 “부동산 투기는 국민경제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사회적 행위라 할 수 있으므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발본색원하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회의 직후 나 부총리는 양도세 강화, 토지공개념 적극 검토, 토지거래 허가제 확대 등을 골자로 한 ‘8·10 부동산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 호황으로 시중에 돈이 넘쳐 나는 상황에서 ‘투기 근절’은 엄포뿐이었다. 경제성장률은 86~88년에 걸쳐 매년 10%를 웃돌았고 경상수지 흑자도 88년 142억 달러로 사상 최고였다. 경기는 호황을 넘어 과열로 치달았다. 초기에는 주식값과 집값이 동시에 크게 오르는 동조화가 뚜렷했다. 먼저 불이 붙은 쪽은 주식이었다. 86년 1월 100선에 머물던 종합주가지수는 88올림픽이 끝난 직후 900선을 넘어섰다. 89년 3월 31일에는 대망의 1000선을 돌파했다.

집값은 87년까지 옆걸음질 하다 88년에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집값 상승세는 90년 말까지 꺾일 줄 몰랐다. 89년 4월 정부는 5대 신도시 개발계획도 발표했다. 그러나 집값은 정부의 바람처럼 바로잡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도시 아파트 청약에 인파가 몰리면서 부동산 시장은 더욱 과열됐다. 국민은행 부동산조사팀에 따르면 88년 1월부터 90년 12월까지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은 90% 이상 올랐다.

89년 4월을 고비로 주식값과 집값이 따로 움직이는 차별화가 나타났다. 주식값이 급락세로 돌아선 가운데 집값은 ‘나 홀로’ 강세를 이어갔다.

2 1991~1995
고주가·고성장·고물가의 3고
주가는 다시 1000선 돌파
집값은 신도시 입주로 내리막

90년대 초·중반엔 집값 약세, 주식값 강세의 차별화가 두드러졌다. 집값은 조금씩 떨어지는 가운데 주가는 5년 만에 1000선을 돌파했다.
89년 1000 돌파 후 속절없이 하락하던 증시는 92년 8월 지수 500선이 무너지는 것을 끝으로 긴 침체를 벗어났다. 이때부터 바닥을 치고 반등하기 시작했다. 주가는 94년 9월 1000선을 회복했다. 경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경제성장률은 8%대를 웃돌고 원화값은 달러당 700원대의 초강세를 보였다. 언론에선 고주가·고성장·고물가의 ‘3고 시대’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다만 경상수지는 3저 호황 시절과 달리 적자를 면치 못했다.
당시 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장은 주가 급등에 대해 “머니게임의 결과”라고 꼬집었다. 그는 “시중에 돈은 많이 풀렸는데 마땅히 굴릴 곳을 찾지 못하자 주식시장으로 쏠렸다”고 분석했다. 원화 강세에다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 확대가 맞물리면서 외국인의 ‘사자’도 급격히 늘었다.
부동산은 91년 9월 분당신도시 입주 개시가 고비였다. 그전까지 오를 줄만 알고 떨어질 줄 모르던 집값이 마침내 잡혔다. 흔히 ‘부동산 불패’라고 하지만 이 시기엔 부동산 투자로 재미를 보기는 무척 어려웠다. 재테크의 1순위는 주식이었고 아파트는 인기가 없었다. 주택 200만 호 건설이란 대규모 물량 공급의 결과였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값은 91년부터 95년까지 5년간 10% 넘게 떨어졌다.

3 1996~2000년
외환위기로 동반 폭락 후
IT 버블·펀드 열풍에 주가 급등
집값은 완만한 상승 이어가 

90년대 후반은 외환위기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외환위기 이전은 집값 상승, 주식값 하락의 흐름이었다. 돈의 힘으로 치솟았던 주가는 결국 돈의 힘이 약해지자 급락했다. 이후 한보철강·기아자동차 같은 굵직한 대기업들이 연쇄적으로 경영난에 빠지면서 주가는 더욱 고꾸라졌다. 반면 집값은 그동안 하락세를 만회하려는 듯 완만한 상승세를 이어갔다. 96년 초부터 외환위기가 발생한 97년 11월까지 서울 아파트 값은 10%가량 올랐다.

외환위기는 주식값과 집값의 동조화를 불러왔다. 주가지수는 한때 300포인트가 무너졌고, 집값도 순식간에 20% 정도 떨어졌다.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이 모두 패닉 상태였다. 그러나 99년에 들어서면서 주식값과 집값이 함께 반등했다. 특히 세계적인 정보기술(IT) 버블과 맞물린 주가 상승세가 가팔랐다. ‘바이 코리아’로 대표되는 펀드 열풍도 한몫했다. 99년 11월 주가지수는 다시 한번 1000포인트를 회복했다. 그러나 2000년에 들어서자 주가는 500선까지 밀리며 ‘반 토막’이 났다.

반면 집값은 완만하지만 꾸준히 상승했다. 김대중 정부는 침체된 내수 경기를 살리기 위해 잇따라 부동산 경기 부양책을 내놨다. 2000년 말이 되자 집값은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거의 회복했다.

4 2001~2005년
‘부동산 불패’ 신화의 탄생
‘냉·온탕’식 정책에 신뢰 상실
주가는 2005년 들어 급등 

“이렇게까지 많이 풀었습니까.” 2003년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부동산 관련 대책을 보고하는 자리였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김대중 정부가 내놓은 각종 부동산 부양책은 2000년 이후 경기가 살아나자 본격적으로 ‘약발’을 받기 시작했다. 2002년 들어선 한 달이 멀다 하고 부동산 안정 대책이 쏟아진다. 그럼에도 집값은 고공 행진을 계속한다. ‘냉·온탕’ 식으로 부동산 관련 규제를 풀었다 조였다 하는 정부 정책은 시장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서울 아파트값 상승률은 85%에 달했다. 80년대 말 집값 폭등이 재연된 것이다.

반면 주식값은 카드채 사태의 여파로 2004년까지 지지부진했다. 2002년 초 900선을 넘어섰으나 잠시 반짝하고 말았다. 그러나 2005년 들어 주가지수 1000포인트를 회복하며 본격 상승 국면에 접어든다. 이 센터장은 “기업들의 실적이 급속히 좋아지고 중국 특수가 본격화하며 저금리로 유동성이 풍부한 3박자가 고루 맞았다”며 “이때부터 2007년까지 주가는 거침없는 상승세를 이어갔다”고 말했다.

5 2006~2010년
주가, 금융위기 직후 1000선 붕괴
경기 회복과 함께 빠르게 반등
집값은 지난해 말부터 본격 침체 

2006년 초부터 2007년 말까지는 집값과 주식값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주가는 2007년 10월 사상 처음으로 2000포인트를 돌파했다. 저금리로 은행에서 빠진 돈은 급속히 주식형 펀드로 쏠렸다. 그러나 주가 2000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단기 급등에 대한 부담으로 1700~1800선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박스권 장세가 펼쳐졌다. 집값은 조금 더 오래갔다. 2006년 초부터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 사태 전까지 30% 넘게 올랐다. 특히 서울 강남·서초·송파구와 양천구 목동, 경기도 분당·평촌·용인의 7곳에서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며 ‘버블 세븐’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주식값과 집값은 동반 하락했다. 하지만 회복은 전혀 딴판이었다. 주식시장은 침체의 골도 깊었지만 경기회복과 함께 빠르게 반등했다. 2008년 10월과 11월에는 잠시 지수 1000선이 무너졌지만 이때를 바닥으로 1700선까지 수직 상승했다. 주택시장은 금융위기의 충격엔 그럭저럭 버텼지만 지난해 말 이후 본격적인 침체로 접어들었다. 전문가들은 ▶DTI나 주택담보인정비율(LTV) 같은 대출 규제 ▶값싼 보금자리주택 대규모 공급 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부동산 정보업체 닥터아파트는 최근 이명박 정부 전반기의 주택정책을 분석한 자료에서 “DTI 규제가 제2금융권으로 확대된 2009년 10월 이후 투자심리가 급격히 위축했다”고 지적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