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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표적 종합상사 이토추, 고바야시 회장이 밝히는 152년 ‘장수’의 비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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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김창규 기자

고바야시 에이조 회장

지켜왔죠 창업자 이토 추베이의 산포요시 정신

●이토추는 152년 된 장수기업인데요.

“일본엔 오래된 기업이 많습니다. 100년 이상 된 기업이 2만 개나 되니까요. 이는 일본 전체 기업의 1% 정도입니다. 또 1000년 이상 된 기업도 8개나 있습니다.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한 장수기업은 공통점이 세 가지 있습니다. 우선 핵심 업무를 착실하게 지키고 발전시키며 시대와 환경에 따른 변화에 대응을 잘해 왔습니다. 또 규모에 맞는 경영을 했습니다. 지나치게 비대해지지 않고 과도하게 확장하지도 않았지요. 인재도 굉장히 중시했습니다.”

●오래 지속하지 못한 회사는 그렇지 않은 건가요.

“포춘이 선정한 500대 기업의 수명은 인간의 수명보다 짧은 40~50년이라고 합니다. 일본 기업의 평균수명은 이보다 짧은 35년입니다. 이게 일본의 현실이지요. 장수하지 못한 회사는 본업을 벗어나서 새로운 사업을 무지막지하게 확대한 경우가 많아요. 대표적인 예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고구미(金剛組)’입니다. 578년 창업된 일본 건설회사 공고구미는 2005년에 큰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였어요. 오사카에 기반을 둔 이 회사는 도쿄의 부동산을 사는 등 확장 노선을 통해 빚을 많이 졌습니다. 전통 있는 기업이기 때문에 기업 자체는 남았지만 실질적으론 해체됐습니다.”

●핵심사업의 경쟁력을 강조하시는데요. 핵심사업이 사양산업이면 어떻게 하나요.

“기업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식품회사의 경우 올해 유행했던 제품이 내년에 유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업에 시장의 변화란 기회입니다. 그런데 변화하는 추세가 21세기 들어 빨라지고, 폭도 크고, 글로벌화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섭고 어려운 점이지요.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상정하고 이끌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이토추도 순탄치 않았는데요.

“1980년대에 ‘상사무용론’이 불어닥쳤습니다.(※이전까지 상사는 제조업체와 판매업체를 중개해 주는 역할을 했으나 당시 제조업체가 독자 해외영업망을 구축하면서 종합상사가 필요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종합상사는 가치 사슬(Value chain)의 중간쯤에 있었습니다. 상류가 제조업, 하류가 도소매업이라고 볼 수 있지요. 왜 너희(종합상사)가 중류에 위치하느냐 이런 논의가 제기됐습니다. 당시 제가 중견사원이었는데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제조에서 판매까지 가치 사슬 전체를 우리가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강의 상류에도 진출하고 하류에도 진출해 상-중-하의 모든 가치 사슬에 대해 영향력을 가져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취급량의 규모는 줄었지만 이익은 많이 늘었습니다. 90년 매출이 20조 엔이었지만 가치 사슬을 바꾼 후 매출은 12조~13조원대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총이익의 비중은 1.7%에서 7~8%로 크게 늘었지요. 체질 개선이 된 것이지요. 역풍 속에서 새로운 지혜가 싹텄다고나 할까요.”

●10여 년 전에도 어려움을 겪었는데요.

“각종 ‘쓰레기’가 회사 안에 쌓여 있었어요. 이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손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역시 외부의 여러 사업에 손을 대 팽창해 나갔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 큰 경종을 울리게 됐던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토추는 파트너십을 강조하기 위해 많은 기업에 투자했습니다. 주로 어떤 기업에 투자하나요.

“일본에는 지방에 보석 같은 기업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특허를 받기는 어렵지만 핵심 기술력으로 인해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1위 회사가 20개 정도 있습니다. 이런 회사와 제휴를 하거나 이들을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줍니다. 투자는 주로 펀드를 만들어서 하고 있지요.”

●전임 회장은 ‘클린업 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구조조정에 중점을 뒀습니다. 어디에 중점을 두었나요.

“강력하게 회사의 체제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지요. 체제를 강화시킬 수 있는 분야에 진출했습니다. 중국과 아시아에선 생활 소비분야에 신경 썼고요. 또 자원·에너지 분야도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진정한 글로벌 기업이 되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지요.”

●세계 무역을 주도하는 종합상사는 이미 글로벌 기업 아닌가요.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이 상사는 원래 글로벌 기업이 아니냐고 묻지만 상사는 진짜 글로벌 기업이 아니었어요. ‘진짜 도메스틱(내수기업)’이라고 해서 ‘마루도메’라고 불렸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 내에서 일본어를 알지 못하면 서류를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걸 타파해야겠다고 해서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골자는 다양성입니다. 인재의 경우 성별, 국적, 나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단지 실적만 중시합니다. 일본 기업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남성우위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남녀 직원의 비율을 7대3으로 미리 정해 놨습니다.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90년대 버블 붕괴 후 어려움을 겪던 종합상사가 에너지 개발 등으로 2000년대에 부활에 성공했습니다. 현재 중점을 두고 있는 사업분야는 무엇인지요.

“이토추식 표현으로 ‘LINE’입니다. 4개의 사업 분야에서 따온 말인데요. ‘L’은 생활(Life)과 건강·제약 등 건강 관련 사업을, ‘I’는 각종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를 말합니다. 그리고 ‘N’은 나노테크놀로지와 바이오테크놀로지 같은 신(New)기술과 신물질을, ‘E’는 환경(Environment)과 신에너지를 뜻하지요. E는 태양열·지열 발전, 전기자동차 등 다양합니다. 또 이토추가 관심 있는 곳은 중국과 아시아 시장입니다. 이 지역이 놀랄 만큼 발전해 소비자 시장도 대폭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토추상사의 정보력은 세계 최고로 평가받습니다. 수집·분석은 어떤 과정을 거칩니까.

“최고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세계를 중국·아시아·미국·유럽 등 9개 블록으로 나눕니다. 각 블록 대표와 매주 월요일 오전 9시30분부터 낮 12시까지(일본시간) 인터넷으로 회의를 합니다. 세계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든 지역 직원이 공유하는 것이지요. 이 회의에서 우리가 추진 중인 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합니다. 대부분 주요 사안은 이 회의에서 결정됩니다.”

●한국의 종합상사에 조언을 한다면.

“어렵네요. 한·일의 기업 연합군을 만들어 강점은 강화하고 약점은 보완해 세계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야구로 말하면 한국의 삼성이 3루수를 맡으면 이토추는 1~2루수를 맡고 나머지 7명의 선수(기업)를 영입해 하나의 팀을 이루는 것이지요. 이토추는 이런 코디네이션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1970~80년대 ‘상사무용론’ 이 제기되자 이토추는 제조업체와 판매업체를 중개해 수수료를 챙기는 사업 방식에서 벗어났다. 단순한 중개뿐 아니라 원료생산에서 제조·판매까지 모두 관리하는 형태로 가치 사슬을 바꿨다. 왼쪽 그래픽은 의류·패션 부문 사례다. 이토추에는 의류 외에 기계, 정보기술(IT)·우주, 에너지·우주, 에너지·금속, 화학·산림, 식품, 금융·부동산 등 7개 핵심 사업부문이 있다.

오늘날 이토추를 있게 한 사람들

이토추 창업자 이토 추베이

이토추상사의 홈페이지에는 ‘성장 모델’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속적으로 가치를 창출한 성장 모형의 진화’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성장 모형이 진화했다니요?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진화하듯 이토추도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변신해 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이 “살아남는 종은 강한 종도, 지적 능력이 뛰어난 종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대응하는 종이 살아남는 것이다”라고 한 말이 딱 들어맞는 회사입니다.

1858년 창업자 이토 추베이(伊藤忠兵衛)가 15세의 나이에 아마 섬유(리넨) 거래로 시작했던 이 회사는 이제는 원유 등 에너지부터 의류·음식 소매업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사업을 하는 초대형 종합상사로 바뀌었습니다. 이 회사의 2010 회계연도(2009년 4월~2010년 3월) 거래 규모가 146조원(10조368억 엔)인데요. 이는 삼성전자의 지난해 매출액 139조원보다 많습니다.

하지만 이 회사도 152년 동안 많은 굴곡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이토추의 역사를 보면 일본과 한국의 종합상사 역사도 알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종합상사는 어려움에 빠집니다. 미쓰이물산과 미쓰비시상사가 전범(戰犯)으로 지목돼 강제 해체됐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종합상사에 대한 규제가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규제가 완화되면서 종합상사는 초고속 성장의 발판을 마련 합니다.

이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일본 종합상사의 산증인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전 이토추 회장입니다. 그는 일본 육군대학을 수석 졸업한 뒤 육군 참모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 때 소련군 포로가 돼 11년간 억류생활을 했지요. 56년에 가까스로 일본에 돌아왔고 2년 뒤 46세에 이토추의 촉탁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그는 군대와 같은 참모 조직을 도입하고 세계에서 수집한 정보를 이용해 섬유 수출업체에 불과했던 이토추를 일본 최대의 종합상사 반열에 올려놨습니다. 67년 중동전쟁이 6일 만에 끝나리라는 것을 예견했고 73년 오일쇼크가 터질 조짐을 미리 읽어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70~80년대 들어 종합상사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전까지 종합상사는 제조업체와 판매업체를 중개해 이익을 남겼지요. 하지만 무역 장벽이 걷히고 제조업체가 독자적인 해외 영업망을 확보하면서 ‘상사무용론(商社無用論)’이 대두됐습니다. 이때 이토추는 변신을 시도합니다. 중개와 신용보증을 통한 수수료 수익에 의존하는 사업방식에서 벗어나 원료에서 생산·판매까지 모두 아우르는 전 부문의 투자 확대(가치 사슬의 통합)로 성장 모델을 바꿨습니다. 제휴를 강화하기 위해 가능성 있는 기업에는 직접 투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위기를 극복하는 듯했으나 90년대 후반 다시 어려움에 빠졌지요. 버블이 붕괴하면서 부동산 등 본업 이외에 너무 많은 곳에 손을 댔던 많은 종합상사가 생사의 기로에 직면하게 된 것이죠. 이토추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니와 우이치로(丹羽宇一郞) 당시 회장은 스스로 ‘청소부(Clean-up guy)’라고 표현했듯이 대대적인 구조조정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우선 99년 4000억 엔에 달하는 부실자산을 대손상각했습니다. 이를 발표한 날 이토추의 주식은 12%나 떨어졌을 정도로 시장의 충격은 컸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97년 1000여 개에 달하던 자회사를 459개 자회사와 202개 계열사로 대폭 줄였습니다. 니와 회장이 지저분한 ‘쓰레기’를 ‘청소’했다면 후임인 고바야시 에이조 회장은 회사의 토대를 튼튼히 하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고바야시 회장은 다른 경쟁자와 달리 제조업자가 되는 데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150여 년 동안 유지돼 온 핵심 경쟁력인 무역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일본 이외의 국가에는 종합상사와 같은 형태의 회사가 드물지요. 이 때문에 세계 네트워크를 잘만 활용하면 큰 시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의류·식품과 같이 소비자와 관련된 부문, 정보기술(IT)·천연자원·금융서비스 등에 집중 투자했습니다. 또 중국과 같은 신흥개도국에 투자를 강화했습니다.

한일영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일본 종합상사의 변신 전략은 인프라·곡물·식품 등 경기 변동에 영향을 덜 받는 사업의 비중 확대, 가치 사슬 통합, 신흥개도국 투자 집중 등”이라고 말합니다.

고바야시 회장은 이런 표면적인 것 외에 창업자 때부터 내려온 ‘이토추의 DNA’를 성공 비결로 꼽습니다. 창업자는 산포요시(三方よし)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구매자·판매자·사회에 모두 좋아야 장사가 지속된다는 겁니다. 사회에 공헌하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면 안 된다는 뜻이지요. 도전정신과 인재 활용도 이토추 DNA로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쩌다가 우연히 잘되는 경우와 열심히 노력했는데 잘 안 되는 경우를 접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 도전정신이 있는 인재를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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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종합상사 설립 … ‘세지마 보고서’가 도움

박정희 전 대통령

“1970년대 (삼성그룹 비서실에 근무할 때) 이병철 삼성 회장과 세지마 류조 이토추 회장의 가교 역할을 해 ‘세지마 보고서’가 나오게 됐다. 이 보고서를 정부에 건의해 한국에서 종합상사의 시초가 만들어졌다.” (정부의 법 제정으로 75년 삼성물산이 국내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종합상사로 지정됐다.)

손병두(69) 한국방송공사(KBS) 이사회 의장은 최근 고바야시 에이조 이토추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손 의장은 이어 “이토추 측 고문이 삼성물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도했다”며 “이토추에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고바야시 회장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말씀을 들으니 옛 생각이 떠오른다. 74년 처음으로 해외 출장을 간 곳이 서울의 삼성그룹이었다. 당시 세지마 회장의 메시지를 갖고 갔는데 신입 사원으로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삼성 측에서 ‘정말 좋은 얘기 했다’고 말을 했다.”

세지마 류조 이토추 전 회장

세지마 전 이토추 회장은 한국의 종합상사에 큰 영향을 줬다. 직접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수출과 종합상사에 대해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 육사 선배다. 46세에 이토추에 입사한 그는 4년 뒤 이사에 올랐다. 입사 20년 만인 78년 회장에 오른 뒤 10년간 회장을 지내며 다른 회사와 제휴·합병을 주도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그는 야마자키 도요코(山崎豊子)의 베스트셀러 소설 『불모지대』의 실제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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