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지 못한 설움 안당해보면 몰라요'

중앙일보

입력 2002.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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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육칠은 사십이, 육팔은 사십팔, 육구 오십사. 칠일은 칠…."

칠판에 써놓은 'ㅍ''ㅎ'등 한글 자음을 열심히 공책에 베끼는 한글기초반 학생들도 대부분 노인들이다. 평생을 삭여온 무학(無學)의 한(恨)을 배움에의 정열로 승화시키는 늦깎이 학생들. 李씨는 20∼70대 만학도들의 이 배움터를 갈고 닦는 지킴이다. 제자들로부터 선망과 존경을 받지만 그들의 동반자이자 선배다.

한때 李씨의 학력도 전남 무안군 해제면 해제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그러나 희망학교에서 희망을 낚았다. 이곳에서 배워 고입·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방송통신대 중어중문과를 졸업했다. 또 광주대 문예창작과 3학년에 편입, 지난해 학사모를 썼다. 따라서 李씨는 학사 학위가 두개다.

그는 한학자인 아버지와 무학(無學)인 어머니 사이의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아들들에겐 공부를 시켰으나 딸들은 집안에 묶어놓는 전형적인 시골 선비였다. 그래서 李씨는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했다. 큰집 사촌언니들은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그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딸을 초등학교에 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李씨를 다그치곤 했다.

"날마다 아버지 방 앞의 문지방에서 울어라. 학교 보내달라고 떼를 써라."

결국 그는 또래들보다 석달 늦게 초등학교의 문을 밟을 수 있었다. 2학년 때의 어느 날 교사였던 사촌오빠가 집을 찾아와 "당숙, 심이는 영리해 월반해야 겠소"라고 말했다. 그는 곧 3학년으로 진급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몇년 되지 않았고 시골이라 월반이 가능했다. 그는 중학교에 진학할 요량으로 또래 여학생 두명과 함께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교육감 상을 받지 못했다"며 딸의 중학교 진학을 막고 천자문과 격몽요결 등 한문을 가르쳤다. 열여덟살까지 한문 책을 붙잡고 살아야 했던 그는 밭을 매거나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도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의원 집 식모로라도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딸들은 밖으로 내보내선 안된다"는 아버지의 뿌리 깊은 유교 사상 때문에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허전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달래기 위해 닭을 키웠다. 메뚜기를 잡고 배추 잎을 뜯어다 열심히 길렀으나 닭 60여마리가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런데 이 일이 그를 시골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막내 딸의 풀죽고 그늘진 얼굴을 보기가 안타까웠던지 부친은 "기술이나 배워라"며 목포에 사는 외삼촌 댁으로 보냈다. 양재 기술을 익혀 양장점을 꾸리던 그는 23세 때 결혼했다. 중매장이가 시댁 어른들에게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가씨라고 속였다. 남편을 비롯한 8남매가 모두 고등 교육을 마친 집안에 시집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 때부터 배우지 못한 데 대한 속앓이가 시작됐지"라고 李씨는 회고했다.

李씨는 손목에 찬 시계의 브랜드를 묻는 시아버지께 '스위스'(시티즌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라고 대답했고 혈액형은 귀에 익은 'A형'(실제로는 O형이다)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들 3형제의 가정통신란에 자신의 학력을 대졸·고졸·중졸 등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낮은 학력을 숨기기 위해 붓글씨와 분재·한춤 등 강좌를 들으러 다니곤 했다. 꿈속에서 그는 항상 학생이었다. 교실 뒷자리에 앉아 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다가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똑똑하고 말 잘하는 누구네 엄마가 알고보니 학력이 보잘것없더라는 식으로 베일이 벗겨질 때 그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84년 그는 TV에서 신입생 모집광고를 보고 광주시청 맞은편 서방네거리에 있는 희망학교를 찾아갔다. 문을 들어서면 '나는 무식쟁이다'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밝혀야 한다는 자책감 때문에 학교 주변을 맴돌다 집으로 발길을 옮기곤 했다.

결국 한달이 지나서야 학교에 등록하고 3개월 과정의 영어·수학 주부교실을 마쳤다. 그리고 학교 이사장과 교사들에게 생트집을 부렸다. "아랫동서들에게 허물을 보여줬으니 학교는 나를 더 가르쳐줘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는 결국 중학 과정에 입학해 아들 또래들과 공부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주방·화장실·안방은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으로 도배하다시피 채워졌다. 당시 중학교에 입학한 큰아들과 회사원이던 남편은 가정교사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남편 김용무(金容武·58·사업)씨는 그에게 버팀목이 돼주었다.

李씨는 86년 여름 고입 검정고시에서 전남도 최고령자로 합격했다. 시부모를 모시는 큰며느리로서 집안살림과 학업을 모두 견뎌내느라 몸무게가 48㎏을 넘는 날이 없었다. 李씨는 "며느리·형수·올케로서 빵점이었다"고 회고했다. 학원을 다니면서 1년반 만에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88년 방송통신대 중어중문과에 입학했다. 이 때부터 그는 희망학교에서 자원봉사자로 한문을 가르쳤다. "내 인생의 또 다른 보금자리요 배움터에서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는 생각에서였다.

방송통신대 과정과 병행하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교사 한명이 출근하지 않으면 학생 열명이 공부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희망학교에 열심히 출근했다. 그러면서 6년 만에 정규 대학을 졸업했다. 96년 그는 자원봉사 교사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희망학교 교감으로 추대됐다. 물론 월급은 받지 않았다.

李씨는 이때부터 교육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뛰었다. 못배운 한을 풀려고 희망학교를 찾았으나 검정고시를 통과해야 초·중등 졸업장을 딸 수 있게 돼있는 제도적인 장벽을 허물기 위해 애썼다. 그는 4년 동안 문턱이 닳도록 교육청을 드나들며 "학력 인정을 해달라. 시설이 부족하면 보완하겠다"고 호소했다. 그러는 사이 관련 법조항을 모두 외울 정도가 됐다. 희망학교는 2000년 3월 시설 보완과 재단 설립 등을 조건으로 광주시 동부교육청의 학력 인정 밀알희망중학교로 거듭났다. 학교는 개나리·사랑·자유반 등 초등과정 7개 반과 중학과정 6개 반, 야학반으로 구성됐다.

학력 인정 기관으로 등록된 중학 과정은 교육청에서 발령받은 정교사 21명이 가르친다. 그러나 한글기초에서 중학예비반까지의 초등과정과 야학반은 대학생·학원 강사·정년퇴직자 등 자원봉사자 60여명이 맡고 있다. 재단이 설립되면서 李씨는 교장으로 승진했다. 이제 그는 고교과정의 개설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7월 광주시 동구 내남동 야산에 학교부지 5백20평도 사놨다. 주택을 담보로 받은 융자금과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빚으로 땅값을 치렀다. 든든한 후원자인 남편 金씨는 "이러다간 우리 거덜나는 거 아닌가"하면서도 인감도장을 내주었다.

몇달 전 교육부로부터 '부지와 교사(校舍)가 없는 학교법인은 보조금 지원 대상이 아니다'라는 통보를 받았다. 인가를 취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밀알희망학교는 지금껏 이사를 열번이나 했다. 현재도 5층 건물의 1∼2층을 빌려 운영하고 있다,)

교육청의 도움으로 인가 취소가 2004년까지 유보돼 중학교 1학년 과정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은 졸업할 수 있게 됐다. 어쨌든 내년 3월 이전에 건물을 짓고 교육부에 서류를 올리고 중학과정 신입생을 받아야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학교의 존폐가 걸려 있는 어려움에 봉착한 그에겐 근심 없는 날이 없다. 하지만 배우겠다는 각오가 남다른 늦깎이 학생들의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을 굳게 다진다. '늦바람'난 이 땅의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할아버지들에게 배움 공동체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굳이 교육의 연속성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공부는 중단하면 다시 붙잡기 어렵습니다. 교육 당국의 배려가 정말 아쉬운 때입니다."

광주=구두훈 기자

dhkoo@joongang. co. kr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고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이들이 책을 다시 잡기란 쉽지 않다. 특히 교양있는 주부로, 선생님 같은 어머니로 인식돼 온 여성이 어느날 문맹(文盲)을 겨우 면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배움의 길로 들어서는 건 매우 어렵다. 광주시 북구 누문동에 있는 밀알희망중학교 교장 이심(李心·54)씨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학사모를 썼다. 그리고 이웃의 눈을 밝혀주는 데 열성을 쏟고 있다. 이 학교는 2년 전 교육청의 인가를 받아 중학교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한쪽으로 비켜서야 앞에서 오는 사람이 지나칠 수 있는 비좁은 복도에 '우리는 진리를 위해 쉬지 않는다'고 쓴 서예 액자가 걸려 있다. 3평 남짓한 교실에선 주름살이 깊게 파인 할머니 대여섯 명이 힘차게 외친다.

밀알희망중학교는 35년 전 전남 화순군 이양면 오유리 하천 둔치에 한 칸짜리 벽돌 건물이 들어섰다.

시골 역장으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온 지체장애인 청년 정영식(鄭英植·당시 27세)씨는 농한기에 도박으로 소일하던 마을 청년들에게 병아리 부화 기술이라도 가르치기 위해 건물을 세웠다. 배움의 기회를 잃은 15명으로 문을 연 희망학교의 탄생 배경이다.

독학으로 학문을 깨우친 鄭씨는 그 이듬해인 1968년 유달영(91)박사가 창설한 재건국민운동중앙회에 재건학교로 등록했다.

두 차례 이사한 뒤 71년 화순군 능주면에 운동장 5백평, 교실 4칸, 기숙사 1동을 갖춘 건물을 마련했다. 재건국민운동중앙회가 해체되자 76년 새마을청소년학교로 재등록했다.

그러나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자전거로 시골을 누비며 학생을 모집하던 鄭교장은 과로와 악성 골반 종양으로 78년 서른여덟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문을 닫을 위기에 놓인 학교를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던 형 영관(英寬·67·현 이사장)씨가 떠맡았다. 하지만 청년들이 도시로 떠나는 바람에 학생을 모집할 수 없었다.

결국 82년 광주시 북구 유동으로 옮겨 중·고교 과정 야간학교를 개설했다.

하지만 월세조차 못내 떠돌이 야간학교를 운영해야 했다. 이 때 박성수(작고)장로와 홍효순 권사 부부가 독지가로 나섰다. 이들은 희망학교의 터전이 된 3층 건물을 마련해 주었고, 단독주택을 학교에 기증했다.

鄭이사장과 李교장의 헌신, 독지가들의 후원, 연인원 2천2백여명에 이르는 대학생 자원봉사자의 지원 등에 힘입어 밀알희망중학교는 검정고시 합격자 2천7백여명(전체 수료자 4천3백여명)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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