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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 무는 옛것과 새것, 곡 선정의 묘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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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호 09면

영화 ‘와호장룡’ 작곡가인 탄둔(53)의 ‘원형(Circle)’은 12명의 연주자를 위한 작품이다. 하지만 7월 29일 강원도 대관령 알펜시아홀에서 제7회 대관령국제음악제의 개막 연주회로 이 곡이 연주될 때 무대에는 연주자 세 명과 지휘자뿐이었다. 나머지 아홉 연주자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바이올린ㆍ첼로ㆍ비올라와 만돌린ㆍ기타ㆍ하프가 각각 1층 객석의 왼편ㆍ오른편에 나눠 앉았다. 객석 2층 맨 앞에는 플루트ㆍ오보에ㆍ클라리넷 주자가 섰다. 연주자들이 청중을 에워싼 ‘원형’이었다. 탄둔은 청중에게도 “바람소리를 내라” “서로 이야기하며 떠들어라”는 등의 지시를 내려 객석까지 무대로 끌어들였다.

7월 29일 알펜시아홀에서 열린 ‘대관령국제음악제’ 개막 공연

개막 연주회는 이 같은 현대적 실험으로 문을 열었다. 이날 아시아 초연된 ‘원형’의 음색 역시 실험적이었다. 현악기는 높은 음을 사용해 외마디 소리를 냈고, 관악기는 짧고 극적인 외침으로 응대했다. “침묵이 그 무엇보다 다이내믹하다”는 작곡가의 노트처럼 음표보다는 쉼표가 많은 작품이었다. 작품의 진가는 음악이 끝날 때 나왔다. 탄둔은 서기 1세기의 음악을 가져왔다. 기보화돼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세이킬로스의 비문(Epitaph of Seikilos)’을 모든 연주자가 콧노래로 부르도록 했다. 느리고 신비로운 선율이었다. 침묵과 소음의 음악에 참여했던 연주자와 청중이 고대 그리스의 음율로 휴식을 취했다.

‘창조와 재창조’는 이번 음악제 전체의 주제다. 음악감독 강효씨는 이전 시대의 음악ㆍ문학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을 골라 음악제 전체에 배치했다. 예를 들어 낭만파 시인 존 키츠(1795~1821)에게 영향을 받아 벤저민 브리튼(1913~76)이 작곡한 ‘젊은 아폴로’, 브리튼을 추모하는 아르보 패르트(75)의 ‘브리튼을 추모하는 성가’ 등 옛것과 새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된다.

첫날 관심을 모았던 또 다른 작품은 미국의 현존 작곡가인 리처드 대니얼푸어(54)의 ‘축복받은 자의 눈물’이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작품인 진혼곡에 기초한 현악 앙상블이다. 그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이 곡의 마지막 여덟 마디를 가져왔다. 현대 작품이었지만 화음은 단정하게 흘러갔다. ‘축복받은 자’가 뜻하는 모차르트의 안식을 기원하듯 작품은 뒤로 갈수록 조화로운 화음에 다가갔다. 이 또한 아시아 초연이었다.

객석에 앉아 연주를 지켜본 대니얼푸어는 “음악은 대화라는 기본 원칙을 가지고 있다. 내가 어릴 때 모차르트를 들으며 배운 후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신념”이라고 말했다. 모차르트와 같이 청중이 즉각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선보이겠다는 말이다. 그는 또 “스트라빈스키가 말했듯, 모든 음악은 춤추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18세기의 모차르트와 20세기의 스트라빈스키, 21세기의 대니얼푸어가 공유하고 있는 음악의 기본에 대한 설명이기도 했다.

이처럼 올해 대관령국제음악제는 연주 곡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연주 프로그램의 배열도 하나의 스토리가 되도록 한 것이다. 연주자와 연주 수준ㆍ방식에만 주목하던 청중에게 새로운 즐거움이다.

개막 공연의 마지막 연주곡은 모차르트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K.364였다. 대니얼푸어의 추모에 이어진 일종의 회상이었다. 소규모 관현악단에 바이올린ㆍ비올라가 독주자로 협연하는 형식의 작품이다. 이날 출연한 토트 필립스(바이올린), 로런스 더튼(비올라)은 강렬하고 대담한 해석을 보여줬다. 모차르트의 고전시대라기보다는 자유로운 낭만 시대 혹은 현대적인 재즈풍의 연주라 할 만했다. 마지막 곡이 끝났을 때 청중은 현대와 고전 음악, 고대 그리스의 음악을 한꺼번에 살펴본 경험을 가지게 됐다.

2004년 시작한 대관령국제음악제는 현재 변화의 시점에 있다. 1회부터 음악감독을 맡았던 강효씨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사임한다. 첼리스트 정명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자매가 내년부터 음악감독에 취임한다. 음악제를 주최하는 강원도는 이광재 도지사의 직무정지로 어수선한 상황이다. 올해 새로 지어진 알펜시아홀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창조와 재창조’라는 올해의 주제는 절묘하게도 음악제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내년 여름 대관령에서는 어떤 음악제가 재창조될까. 올해 음악제는 8월 13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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