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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3>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 37. 나의 여가생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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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옛날 장충동 자유센터 안에 골프 연습장이 있었다. 지금 '드라이브 인 시어터'가 들어선 바로 그 자리다. 나는 1969년부터 이곳을 드나들며 골프를 배웠다. 박형준 등 포클로버 멤버와 함께 했다.

나는 한달쯤 레슨을 받고 필드에 나갔다. 지금의 서울대 자리인 구관악 골프장이었다. 한동네 살던 어느 형이 함께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결과는 역시나,헛방의 연속이었다. 대충 센 것만 1백50 타수 정도였으니,그것은 친 게 아니라 던진 수준이었다.

"도무지 창피해서 안되겠어. 시간도 없고,당장 때려치자." 그러나 그 동네 형이 어찌나 닦달을 하는지 안했다간 큰 일이 날 것 같았다. 따지고 보니 꽤 비쌌던 연습장 등록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백팔십도 생각을 바꿔 맹렬한 연습에 돌입했다. 그런 다음 아예 가요계 동료를 중심으로 모임까지 만들어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 당시 일본의 유명한 악단 이름이 멋있어서 그걸 모방한 '샤프 앤드 플랫'(장조와 단조)으로 모임 이름을 정했다. 작곡가 길옥윤, 권투선수 김기수, 포클로버, 코미디언 곽규석 등 열아홉명이 회원이었다.

이들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시합을 하면서 골프 자체를 즐길 수 있을 정도가 되니 '이제 그만하겠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더군다나 이미 말했듯이, 60년대 말은 나름대로 가요 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고 있던 때라 골프가 내겐 큰 위안이었다. 골프를 치면서 잡다한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골프는 정신 건강에 참 좋은 운동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사이 실력도 늘어 74년에는 경기도 문산에 있는 뉴코리아 골프장의 클럽 대표선수로 뽑혀 두번이나 '클럽 대항전'에 나가기도 했다. 나는 싱글 수준이었다. 두루뭉실한 지금의 내 체격을 보면 도저히 그런 수준이 상상이 안가겠지만,30대 후반에는 비록 뚱뚱해도 꽤 날렵한 편이었고 운동 신경도 괜찮았다.

이 무렵 다행히 골프에 대한 가요계의 선입견도 우호적인 쪽으로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내 취미에 합류했다. 작사가 조남사·유호·김석야,곽규석,박형준이 단골 멤버로 어울려 취미 활동을 함께 할 수 있었다. 특히 박형준은 골프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연습 시작 석달만에 1백타 안쪽을 기록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골프를 일찍 시작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닦은 실력이 남아서인지 지금도 90∼1백타 수준으로 재미있게 즐기고 있다. 쇼트 게임이 예전만 못한 게 영 아쉽다. 처음 골프를 시작할 무렵 골프피가 1천5백원(캐디팁 5백원 별도) 정도였다. 당시 TBC의 '쇼쇼쇼' 1회 출연료가 1천8백원이었으니 만만한 비용은 아니었다.

골프를 하면서 내 나름대로 깨달은 철학이 있다. '골프는 참을성과 기억력,그리고 상상력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골프 예찬론자라고 비난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이런 깨달음을 통해 나는 후회없는 내 가요 인생의 밑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 특히 한가지 길을 가는 사람에게 인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모른다.

말이 나왔으니 이 무렵 재미 있는 취미 모임 한가지를 더 소개한다. 비대한(肥帶漢)들의 모임인 '돈영회(豚泳會)'다. 70년대 초 몸무게가 70㎏이 넘는 '돼지같은' 친구들이 모여 수영을 하자고 해서 만들었다.

YMCA 수영장에 모인 창립회원은 모두 여섯이었다. 처음 '수영하자'고 제안한 나를 비롯해 바리톤 진태섭,작곡가 나규호·김강섭,연주자 김정태,작사가 전우였다. 75∼90㎏에 가까운 '돼지'들이었다.

당시 부부였던 작곡가 이봉조씨와 가수 현미씨를 회원감으로 정해 놓고 모임에 끌어들이려고 애썼지만 본인들이 몸무게를 '낮춰' 성사되지 못했다. 아무튼 수영실력이야 대단하진 못했지만, 한달에 한번이라도 바쁜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유쾌한 한때를 보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내 수영실력은 어릴적 집 근처 파고다 공원 풀에서 배운 '개구리 헤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여가 활동이 없었으면,나는 인기의 하락을 실감하며 70년대를 적적하게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리=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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