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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부른 '들풀의 노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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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외국 유학기간 중 방학을 이용해 찾은 고국. 돌아온 첫날 밤 기관원들에 끌려갔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더욱이 간첩죄목와 함께 무기징역형까지 선고 받는다면.

그런 상황은 신간의 저자 황대권(47)씨에게 실제로 닥쳤던 일이다. 그는 학생운동이 전국 조직을 갖췄던 1985년 당시 신군부 정권이 만들어낸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걸려든 것이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에서 유학하던 황씨가 참여했던 토론 모임의 한 멤버가 귀국길에 북한을 방문한 사실이 간첩단 조작의 빌미가 됐다. 꼬박 13년 수형생활동안 서른살의 지식인은 지난 98년 중년사내가 돼 출소했다.

신간은 황씨의 옥중 서한집이다. 한데 그 신간이 유별나다. '감옥에서 체득한 생태학의 실전'이다. 즉 절해고도 교도소에서 황씨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거미·사마귀·청개구리와 교도소 운동장에 마련한 화단에서 가꿨던 1백여종의 야생초였다.

신간은 황씨가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 중 야생초와 벌레 관련 편지들만을 모았다. 그가 볼펜으로 그려넣은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야생초 그림이 곁들여진 황씨의 편지들은 그 자체가 작품이다.

황씨는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식용으로 야생초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만성기관지염, 요통을 이겨내기 위해 생각다 못해 야생초를 먹기 시작한 것이다. 끼니마다 야생초를 먹다 보니 온갖 잡풀들을 뜯어다가 물에 살짝 데쳐 된장에 무쳐 먹는 '들풀 모듬', 씀바귀·민들레·뽀리뱅이·제비꽃·조뱅이·방가지똥·닭의덩굴 등 이름도 생소한 풀들로 담근 '모듬풀 물김치', 민들레 뿌리·냉이·도라지·인삼가루 등 10가지 재료를 5일간 뭉근히 졸여서 만든 '십전대보잼' 등 엽기 요리들도 개발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신간은 훌륭한 식물도감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황씨의 속생각은 야생초에 대한 단순한 애정을 넘어선다. '쓸모가 없고 제초제에 내성이 강한' 풀들을 뜻하는 '잡초'의 사전적 정의는 다분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 개입한 결과다. 때문에 잡초라는 이름보다 야초(野草), 야생초로 불러야 맞다는게 황씨의 생각이다.

황씨의 생각은 "파멸의 길로 향하고 있는 도시 문명·자본주의를 청산하고 수많은 지역 생태 공동체들의 연합으로 국가를 재편해야 한다"는 데까지 나간다. "수많은 동·식물의 멸종이라는 생태 위기를 몰고 온 기업형 농업 시스템, 소비자들의 선택과 배제를 통해 인기 없는 농산물 생산을 중단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수퍼마켓 시스템'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정 규모의 지역 생태 공동체들이 야생초를 절멸시키지 않고 야생초와 더불어 농사를 짓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황씨는 지난해부터 생체공동체 연구모임(www.commune.or.kr)을 이끌며 지역 공동체들을 현실화하기 위한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다.

도시를 문닫고 공동체들로 전국을 채우자는 과격한 생태주의적 발상은 아직 우리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얘기 아닐까.

황씨는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도시민들의 3분의 2는 유기적인 전원생활을 꿈꿀 정도로 이미 생태주의는 일반 대중들의 관심사가 됐다"는 게 황씨의 주장이다. 시대의 피해자였던 황씨는 생태주의를 통해 현 시대의 병폐를 치료하는 '근본적인 반란'을 꿈꾸고 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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