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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은 관제살인일 뿐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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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인생은 한 방울의 이슬과 같다. 어느 순간 사라질 운명에도 햇살을 받으면 그지없이 영롱함을 뽐내지만, 그믐밤 밤이슬은 존재 자체가 슬픈 게 더욱 그렇다. 이슬은 온 세상에 내린다.

인생의 전당포인 교도소에도 내린다. 하지만 이곳에 내리는 건 언제나 밤이슬이다. 빛이 그믄 탓이다. 그래서 듣기만 해도 칙칙한 이곳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사람은 분명 뭔가 있는 사람이다. 서울구치소 종교위원이자 기독교 책임목사로 20년째 사형수들을 최후까지 인도(?)해 오며 사형제도 폐지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문장식(文植·66·상문교회 담임)목사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초겨울의 음산한 바람이 제법 앙칼지던 1995년 11월 2일-. 새벽같이 서울 도봉구 쌍문동 집을 나서는 文목사의 발걸음은 무겁다. 전날 밤늦게 서울구치소로부터 "중요한 일"이라며 통지를 받고 나가는 길이다. 감이 잡히는 게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택시를 타고 가는 중에도 내내 가슴을 짓눌러 오는 답답함이 천근만근이다.

한 시간이 채 안 걸려 도착해 보니 역시 그 일이다. 사형집행-. 마음을 다잡으려 창밖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해보지만 헛일이다. 오전 8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계바늘의 재촉에 서둘러 구치소 내 왼켠에 자리잡은 사형장에 들어가니 자신과 함께 종교별 집례를 담당할 신부와 스님도 잿빛 얼굴로 입회인석에 앉아 있다. 정면으로 조금 떨어진 마루판 위엔 이 날의 주인공이 의자 위에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절차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한 해 전 세상을 경악케 했던 지존파 두목 김기환(당시 27세)이다. 인적사항과 죄명을 확인하는 구치소장의 인정신문에 이어 그가 귀의한 천주교의 의식에 따라 신부가 기도를 해주자 평안히 받아들이는 게 진짜 지존파 두목이었나 싶다. 하지만 "어머니께 새 인생을 걷는다고 전해 달라"는 유언이 끝나자마자 그의 얼굴엔 검은 두건이 씌워지고 목에 올가미가 걸리는가 싶더니…, "덜커덩" 소리와 함께 마루 밑바닥이 꺼지면서 그의 몸이 허공에 달린다.

의무과 소속 검시관이 사망을 확인하는데 오전 8시15분이다. 이어 두번째 사형수가 등장한다. 김현양(당시 23세)이다. 순간 다시 한번 가슴이 울컥한다. 검거 직후 "죽일 놈들을 다 못 죽이고 잡혀 억울하다"며 세상에 대한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가 자신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된 삶을 살고 있었는데, 그가 가야 하다니…. "피해자 가족들에게 용서를 빕니다. 큰 죄를 짓고 이곳에 왔지만 이곳에서 구원을 얻게 돼 기쁘다"는 유언이 비수같이 가슴을 파고든다.

그를 떠나보낸 뒤에도 文목사는 이날 오후가 다 가도록 '관제살인'의 현장을 지켜야 했다. 이날 서울구치소에서만 지존파 6명 등 모두 12명에 대한 사형 집행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사형수는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영원한 미결수.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아직 살아 있구나"하는 생각에 또 하루를 연명하지만 교도관의 헛기침만 들려도 불안한 생즉여사(生卽如死)의 삶이다. 김영삼 정권 말기인 97년 12월 30일 여성 4명을 포함한 23명에 대한 집행을 마지막으로 광복 후 지금까지 1천6백34명이 갖은 죄목으로 처형됐다. 현 정권 들어서는 집행을 하지 않아 현재 55명의 사형수가 있다.

83년 서대문구치소의 종교위원이 된 이래 文목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형수만 지금까지 모두 71명. 이윤상군 유괴살해범 주영형을 비롯, 안성농협 카빈총 강도살인사건의 최은수, 서독 의사 간첩사건 김진모, 지존파 일당과 서진룸살롱 사건 범인들 등 하나 같이 세상에 공포와 전율을 안겨주었던 희대의 살인범들이거나 국기 관련 사범들이다.

그도 사람일진대 이같이 인간의 생명을 인간이 강제로 끊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원초적인 혐오와 욕지기에 벌써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법한데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인간의 심판으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더라도 그건 한때의 실수 때문입니다. 처음엔 아무리 표독스럽던 사형수라도 1백 중 아흔아홉이 종교에 귀의해 짧은 기간이나마 착하게 살다 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통스럽고 힘들다고 이들을 내버려두면 되겠습니까."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씩 사형수들과 만나 신앙지도를 하고 있는 文목사는 "예수님도 사형수였다"며 "이들과 함께 고민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절로 생명에 대한 존엄성에 대해 깨닫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교화를 통해 '악마'의 탈을 벗고 '인간'으로 되돌아온 사형수들이 지존파 두목 김기환의 경우처럼 깊은 참회와 함께 불우이웃을 위해 영치금을 맡기는가 하면 자신의 장기는 물론 몸뚱이를 통째로 기증하고는 마지막 길을 떠나는 감동을 숱하게 겪었다. 김기환은 부하들이 모두 종교에 귀의한 뒤에도 스스로 악마라고 부르짖다가 대법원 확정판결을 보름 앞두고 영세를 받으며 장기와 시체를 기증했다.

그는 또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도 사형대에서 모든 것을 용서하는 죽음들로부터 진정한 화해가 무엇인지도 가슴깊이 새겨 배웠다. 그는 지금도 안성농협 카빈총 강도살인사건 범인으로 85년 10월 사형이 집행된 최은수(당시 30세)를 잊지 못한다. 형이 확정된 뒤에도 재심 청구를 되풀이하며 '무죄'를 주장, 서울변협이 나서 구명운동을 벌이던 중 집행되자 "오판한 판·검사와 위증을 한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후 처형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 사형수들을 대할 때만 해도 사형이 필요악이거니 막연히 생각했던 文목사는 오판에 의한 억울한 죽음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진정한 교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회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특히 87년 4대독자 사형수(강도살인)가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를 외치며 처형되자 노모가 이듬해 구치소 뒷산에서 음독자살하는 등 한 가정이 완전히 박살나는 것을 보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고민 끝에 구치소 생활을 접을까도 했지만 너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단 생각이 들어 결국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 89년 서승원 스님·이상혁 변호사 등과 함께 사형폐지협의회를 구성해 활동을 시작했다.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겁니다. 그건 사형수에게도 마찬가집니다. 살인을 했다 해서 사형에 처하는 건 사적인 보복 대신 공적인 보복일 뿐 본질에선 다를 게 없습니다. 용서 없는 보복·응징 행정으로 범죄를 예방하겠다는 것은 애당초 잘못된 겁니다."

사회적으로 겁을 주어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사형집행 뒤에도 잇따른 강력사건이 터지는 걸 보면 말짱 허황될 뿐만 아니라 공정하게 재판했다 하더라도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아무리 악한 사람도 변하게 마련인데 굳이 목숨을 담보로 죄의 대가를 물어 또 다른 원한을 초래할 까닭이 있느냐는 주장이다. 여기에다 유명한 조봉암(曺奉岩)사건이나 최근 중앙정보부의 조작으로 드러난 인혁당(人革黨)사건처럼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많은 데다 어쩔 수 없이 집행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또 어쩌겠느냐는 것이다.

"무조건 사형을 없애자는 게 아닙니다. 사형 대신 종신형으로 죄인들에게 노동을 통해 죄값을 치르도록 하고, 피해자 가족에 대해서도 국가의 보상과 함께 이들과 연결시켜 화해를 구하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겁니다."

이같은 논리를 바탕으로 끊임없는 설득을 통해 93년 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사형폐지분과를 만든 데 이어 지난해 4월엔 한국기독교사형폐지운동연합회를 발족시켜 대표회장을 맡고 있는 文목사는 여야 국회의원 1백55명의 서명을 받아 사형 폐지를 위한 입법 추진을 서두르고 있다.

文목사가 이같이 사형수 등 재소자들과 직접 관계를 맺게 된 것은 83년 재소자를 돕기 위한 모임인 청우회(靑友會)에 간여하면서부터지만 실은 KNCC 근로청소년복지회(재건대)를 이끌기 시작한 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만여명의 회원 중 대부분이 세칭 '장성(전과자에 대한 은어)'들이어서 자연스레 교정업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오갈 데 없는 출소자들을 위해 86년부터 운영 중인 '태양의 집'도 그런 이유에서다.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67년 윤보선(尹潽善)·정일형(鄭一亨)박사 등과 함께 염광회(鹽光會)를 조직, 한때 정치·사회 개혁에 앞장서기도 했던 그는 그동안 자신으로부터 옥중세례를 받은 1천5백여명 가운데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요즘도 부리나케 구치소를 들락거린다.

이만훈 사회전문기자 mh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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