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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7>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 31. 가수 인생의 절정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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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숨가쁘게 돌아가던 1960년대 내 가수 인생의 황금기도 점점 저물어간다. 60년대 말은 가수로서 최정상에 있었지만, 어찌보면 그것은 곧 현실로 닥쳐올 내리막길의 시작이기도 했다.

60년대 후반에 내가 부른 고만 고만한 노래들은 '옛 이야기''미스터 곰''팔도강산''노신사' 등이다. 이 가운데 '옛 이야기'는 몇 안되는 '비주문 생산곡'으로 지금도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다. 샹송가수로 유명했던 한동훈씨가 작곡을, 정휘화씨가 작사를 했다. 슬로 템포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노래였다.

"그대와 사랑은 지난 옛 이야기/내 마음 속 깊이 새겨진 사랑이여/낙엽이 떨어져 쌓여진 그 거리를/그대와 둘이서 거닐던 추억이여/꽃은 피고 또 지고 세월은 흘러가도/내 마음의 상처를 달랠길 없네/그대와 사랑은 옛 이야기지만/내 마음 속 깊이 그내는 남아있네."

'미스터 곰'은 TBC 드라마의 주제곡이었다. 유호 작사·이봉조 작곡으로 드라마 제목도 '미스터 곰'이었다. '하 하 하 나는 곰이다'라고 호쾌하게 외치고 시작하는 게 일품이었다. 그래서 제목을 '나는 곰이다'로 기억하는 이가 많다.

처음엔 바로 이 부분이 잘 안돼 탤런트 김순철씨의 목소리를 빌려 했다. 다행히 그가 경복고 후배여서 '맨입'으로 가능했는데, 결국은 안되겠어서 맹렬히 연습한 끝에 그것도 내가 하게 됐다. 그런데도 왠지 쑥스러운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노래는 주로 극장 공연에서 인기가 치솟았다. 덕분에 박수도 많이 받았다. 짧지만 함축적인 대사가 현장감을 살리는 촉매 구실을 했다. "미련하다 못났다 골려도 좋다/재주는 없다마는 할 짓은 다한다/태산이 높다하되 못오를 게 무어냐."

김희갑·황정순씨가 노부부로 나온 영화 '꽃피는 팔도강산'의 주제곡을 부른 사람도 나였다. 당시 각 지방 방송국의 개국이 활발한 시기였는데, 이 축하공연을 다니며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신봉승 작사·이봉조 작곡의 노래로 영화 내용을 제대로 담았다. 다분히 신민요적인 느낌이 강한 건전가요였다.

"팔도강산 좋을시고 딸을 찾아 백리길/팔도강산 얼싸안고 아들찾아 천리길/에헤야 데헤야 우리강산 얼씨구/에헤야 데헤야 우리강산 절씨구/잘 살고 못 사는 게 마음 먹기 달렸더라/잘 살고 못 사는 게 마음 먹기 달렸더라/줄줄이 팔도강산 좋구나 좋아."

이밖에 정두수 작사·서영은 작곡의 '노신사', 주동진 작사·길옥윤 작곡의 '폭풍의 사나이' 등도 60년대 후반을 장식한 노래들이다. '노신사'를 부르면서는 "더 나이가 들었을 때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듯기도 했다. 서영은씨는 개그맨 서영춘씨의 형으로 이미 '이별의 플랫폼'이라는 내 노래를 만든 적이 있었다. 다른 동생 서영수씨는 코미디언이자 사회자로 이름을 날렸으니 '서씨네'는 타고난 예인 집안인 셈이다.

이처럼 60년대 후반엔 내 노래가 몰아쳐서 나왔다. 각 방송사 쇼 프로의 중복 출연은 다반사였다. 그만큼 인기 관리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흑백 화면이라지만 의상 하나하나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한창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운명이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런 시대의 변화 탓이었을까,나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점점 깨닫게 됐다. 공연장의 박수 소리가 예전만 못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 것이다. "분명 박수의 색깔이 엷어지고 있어. 노래의 스타일과 컬러를 바꾸든지, 뭔가 다른 길을 생각해야 할 때가 다가 오고 있어." 서글펐지만 당당히 맞서야 하는 과제이기도 했다.

나는 가수로서의 변신이냐 아니면 새로운 일이냐는 두가지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 고민의 끝은 명쾌했다. 처지와 형편이 열악한 가수들의 권익을 위해 일을 할 결심을 굳혔다. 그 시점을 새로운 10년이 시작하는 '70년'으로 잡았다. 그해 한국예술인총연합회 산하의 연예협회 가수분과 위원장을 맡으면서 나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리=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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