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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1>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5. 8군무대의 유망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월급 20만환의 'A급 가수'. 일약 미 8군 쇼계의 유망주가 된 나는 그만큼 바빠졌다. 세상엔 공짜가 없었다. 용산은 물론 의정부·부평·오산·춘천·부산 등 미군 캠프가 있는 곳은 어디나 내 무대였다.

지방 공연은 군용 트럭을 타고 다녔다. 햇볕을 가릴 천막도 없는 짐칸에 몸을 싣고 비포장길을 달려야 했다. 온몸이 뽀얀 먼지로 뒤덮였다. 공연 전 이미 녹초가 돼 무대로 향했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게 아닌데…."

언뜻 후회같은 게 밀려왔지만, 그걸로 오래 고민할 여유조차 없었다. 가요계라는 블랙홀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업계에 소문이 퍼져 각 쇼단의 매니저들이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무대 매너도 세련돼 갔고,제법 다양한 스타일의 노래도 부를 수 있는 감각도 생겼다. 파피는 "이제 노래에 윤기가 나기 시작한다"며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했던가. 파피와의 인연도 정리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마치 히트곡 '하숙생'(66년)의 주인공인 양 4개월 뒤 나는 '쇼보트'를 떠나기로 했다. 데뷔 시절 든든한 후원자였던 파피와의 이별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제 음악적 취향과 보다 잘 맞는 단체로 가고 싶습니다."

떠나는 이유를 묻는 파피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유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어딜 가든지 초심을 잃지 말아라."

나는 '파 이스트 폴리스'에서 2개월을 지낸 뒤 '섬머타임'에 새 둥지를 틀었다. '쇼보트'에서 처음 만난 김병호(전 부산백화점 사장)가 이곳의 매니저로 옮겨와 있었다. 그가 나를 발탁했다. 당시 이 쇼의 간판 가수는 서울 미대 출신의 김서운이었다. 그러나 그가 병으로 요절해 그 공백을 내가 메우게 된 것이다.

'섬머타임'은 당시 미 8군 쇼에 출연하는 20~30여개의 각종 단체 가운데 최정상급이었다. 특히 한창 미국에서 유행하던 쿨 재즈 또는 프로그레시브 재즈 연주에 정평이 나 있었다. 내가 입단한 지 얼마되지 않아 이름이 'A트레인'으로 바뀌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최상용(트럼펫)과 강철구(테너 색소폰)가 악장을 지내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강씨는 나중에 태국에서 활동하며 황실의 인정을 받은 당대 연주계의 대스타였다.

KBS 악단장을 지낸 김강섭은 이때 피아노 반주자였다. 무용수 가운데는 TBC(옛 동양방송)와 KBS에서 안무가로 활동한 한익평이 발군이었다. 그는 개성이 강한 움직임으로 재즈 발레을 멋지게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여자 가수는 박일양이었다. '오늘 같은 밤이면'을 부른 가수 박정운의 어머니다. 나는 가끔 그녀와 듀엣으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빌리 엑스타인과 사라 본이 부른 '올웨이스'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 곡이다.

나는 61년 9월 해병대에 입대하기 전까지 이들과 함께 A트레인의 간판 주자로 활동했다. 미 8군 쇼에서 약 3년간 활동하는 동안 거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 셈이다. 내가 이 쇼를 떠난 뒤 '왕손(王孫)가수' 이석과 팔방미인인 조영남이 바통을 이어 활동했다.

A트레인에 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한달간의 오키나와 원정 공연이다. 개별평가에서 단체 평가로 쇼의 오디션 제도가 바뀌면서 A트레인이 경쟁 단체를 누르고 '스페셜A'를 따냈다. 오키나와 공연은 이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난생 처음 넉장짜리 단수 여권을 쥐고 오산 비행장에서 수송기를 타고 도쿄를 경유해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나는 처음 나라 밖에서 지난 날을 되돌아 보며 가수에 인생의 승부를 걸겠다며 각오를 새롭게 했다. 그리고 태평양의 푸른 파도를 보며 가수로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외쳤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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