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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97>제103화 인생은나그네길 :1.서울대 법대 출신 가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신문을 받아든 아버지는 30여분간 아무 말씀이 없었다.

사법고시에 붙어 법관이 되길 지성으로 빌었던 아버지에게 그날의 기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비보(悲報)나 다름없었다.

"아, 정말 불효를 했구나."

순간 가수가 된 것을 후회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미 나는 되돌아갈 수 없는, 직업 가수 인생의 먼 지점까지 줄달음 쳐 와 있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정공법으로 이 사태를 돌파할 수밖에…."

어떤 힐난도 달게 받겠다며 마음을 가다듬고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이윽고 결코 열릴 것 같지 않던 아버지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그래 할테면 해라. 단, 이 말은 명심해라. 노래 부르는 사람으로, 없으면 안될 사람이 되거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1962년 1월의 그날. 아버지에겐 '미래의 법조인'일 뿐이었던 내가 '가수 최희준'으로 인정을 받은 날이었다.

문제의 그 기사는 대한일보 1면에 실린 것이었다. '미완성의 대기,매력있는 허스키 보이스'로 나를 소개하며 '아마(추어) 출신의 학사가수'라는 설명을 붙였다. '예원(藝苑) 기수'라는 시리즈의 세번째 인물이었다. 대중가수 가운데 내가 유일하게 뽑혔다.

만약 기사만 실렸다면 아버지는 아들이 가수가 된 사실을 모른 채 지나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함께 실린 사진 한 장이 들통이 나게 된 '물증'이었다.

"사진은 분명 네 얼굴인데, '희준'이라는 이름은 어찌된 일이냐."

아버지는 한심한 놈이라는 표정으로 자초지종을 따졌다.

"제 음악 동료들이 지어준 예명입니다. 웃는 모습이 좋다며 희(喜)자를 넣었습니다."

내 본명은 성준(成俊)이다. 마흔살에 나를 낳은 아버지가 지어주신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그러나 어릴 적 마을 사람들은 늦둥이인 나를 '노인 자제'란 애칭으로 부르길 더 좋아했다. 성장하면서 성준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그런데 이제 뜻이 전혀 다른 '희준(喜準)'이란 예명을 갖게 된 것이다.

연유는 이랬다. 첫번째 히트작인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 판을 준비하던 1960년, 당시 남산에 있던 KBS 라디오로 녹음을 하러 갔다. 이곳에서 음악담당 PD인 송영수, 악단장 김강섭(피아노), 트럼펫 주자인 김인배씨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김강섭이 대뜸 이런 제안을 했다.

"이제 성준씨의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나가면 아버지가 가수가 된 사실을 알 게 뻔하다. 그럼 큰 일이니 예명을 갖는 게 좋겠다."

김강섭이 웃는 모습이 좋다며 가운데에 '희'자를 붙였다. 한자가 바뀐 '준'자는 첫 음반(비너스레코드)을 내기 직전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의 작곡·작사가인 손석우 선생이 정한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 신문 기사를 계기로 한동안 내 마음을 짓누르던 큰 짐 하나를 덜 수 있었다. 서울대 법대를 다니며 아버지 몰래 미8군 쇼에 출연해 졸업 후에도 가수로 활동한 지난 3~4년간 내 인생의 항로는 살얼음판 위를 걷듯 조마조마했다. 어머니는 "건강만 하라"며 진작 너그러움을 보이셨지만, 아버지를 넘기는 태산처럼 험해 보였다.

아버지는 '기사 사건'이 있은 지 여덟달 뒤인 9월에 세상을 떠났다. 61년 해병연예대 멤버로 입대해 코미디언 임희춘 등과 함께 강원도 주문진에서 모병(募兵)선전을 하다 부음을 들었다. 나의 '하늘'이 무너진 것이다.

한때 전국 각지에 너른 땅을 소유했던 대지주였던 아버지는 해방 이후 토지개혁으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는 그런 와중에 생긴 화병으로 오랫동안 자리보전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법관 아들을 두고 싶었던 완고한 아버지가 '가수 아들'을 쉽게 인정한 것은, 아마 생의 종착역에서 아들을 통해 세상과 화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당시 기사를 쓴 기자는 지금도 연극 현장을 누비고 있는 연극연출가 임영웅(극단 산울림 대표)이다. 요즘도 우리는 만날 기회가 있으면 당시의 얘기를 화제로 삼곤 한다. 아버지의 별세 직전 그 기사가 한 많은 불효자로 남을 뻔한 나를 구해준 셈이다.

정리=정재왈 기자

<필자 약력>

▶1936년 서울 출생

▶54년 경복고 졸업

▶59년 서울대 법대 졸업

▶60년 손석우 작곡·작사 '우리 애인은 올드 미스'로 가수 데뷔

▶64년 동양방송(라디오 서울) 주최 제1회 방송가요대상 수상

▶66년 MBC 문화방송 제1회 최고인기가수상 수상

▶70~72년 한국연예인협회 가수 분과 위원장

▶96~2000년 제15대 국회의원

▶대표곡='진고개 신사'(63년), '맨발의 청춘'(64년), '빛과 그림자''길 잃은 철새'(이상 65년), '하숙생''종점'(이상 66년), '팔도강산'(67년), '노신사'(68년), '길'(70년), '당신만을 사랑하오''황혼'(이상 86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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