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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30) 좌·우 충돌 한복판, 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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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나라를 지키려고 모였다고는 하지만 생각은 서로 달랐다. 좌·우익의 대립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다. 해방 직후에는 군사조직이 난립했다. 자체적인 무력조직을 확보하기 위해 좌익세력도 군사단체를 내세우고 있었다.

1948년 5월 미국 라이프지에 실린 당시 서울 동대문경찰서 입구의 모습이다. 경찰들이 일본군이 두고 간 92형 중기관총까지 배치해 놓고 경계를 서고 있다.

‘장군의 아들’로 유명한 김두한씨가 이끄는 대한민청(大韓民靑)이 조선국군준비대라는 조직을 습격했던 사건은 그 점을 잘 설명한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당시 조선국군준비대는 지금의 육군사관학교가 있는 서울 태릉에서 1만5000명을 훈련시키는 강력한 군사조직의 하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조직의 간부들이 공산당의 전위대인 ‘남한인민항쟁유격사령부’의 지도부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우익 청년단체로서 강력한 힘을 행사하던 김두한의 대한민청이 이들을 습격했다.

사건이 커지자 미군 헌병대가 김두한과 함께 국군준비대의 무장을 모두 해제했다. 자주 벌어지던 사건이었지만 문제는 해체된 좌익들이 군에 정식으로 합류했다는 점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은 1947년 7월 스스로 군사부를 설치하면서 남한 군부에 조직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남한의 군대 장교 양성기관에 자신의 세력을 부식했다.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직접 입교시키는 방법과 각종 인맥을 동원해 사람을 집어넣는 방법 등을 모두 동원했다.

46년 미군정의 명령에 의해 모든 군사조직이 해제되면서 조선국군준비대 또한 조직이 없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경비대를 창설할 때 사병으로 다시 군에 들어섰다. 48년 10월 벌어진 여순 반란 사건에서 군인으로서 조직적인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 조선국군준비대 출신이라는 점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군대 내부에서는 하극상(下剋上) 사건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46년 5월 벌어진 서울 주둔 제1연대의 1대대 소요 사건도 마찬가지다. 하사관(부사관의 당시 명칭)들이 병사들을 선동해 장교들을 공격한 사건이었다. 당시 선임 중대장이던 정일권 전 총리가 그 홍역을 앓은 주인공이다.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그 소요 사건의 배경에는 사상적 대립도 들어있었다고 당시 1연대의 한 장교는 기억하고 있다.

비슷한 사건은 6월 전남 광산에 있던 제4연대, 10월 전북 이리의 제3연대에서 잇따라 터졌다. 유사시에는 총을 들고 나서서 적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나아가야 할 군대에서 조직의 위계를 부정하는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도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46년 12월 생도대장인 이치업 당시 대위가 자신의 숙소에서 취침 중에 사관 후보생들에게 얻어맞아 의식불명의 상태에 이르렀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앞서 벌어진 1·4·3 연대의 하극상 사건의 여파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좌익 사상을 신봉했던 것으로 보이는 중대장 등 중급 간부들의 영향을 받아 벌어진 사건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유를 잘 알 수도 없고, 원인을 캐려고 해도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이상한 일들이 대한민국 건국 직전의 남한 군대에서 자주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47년에는 군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5월 초였다. 사건은 광주 주둔 4연대의 한 경비대원이 자신의 친형이 좌익 혐의로 광양경찰서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시작됐다. 부대에 이 소식이 퍼지자 4연대 대원들이 토요일인 5월 11일 외출을 나가 경찰서 사찰계 형사들을 폭행한 뒤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다. 경찰도 보복 차원에서 그 다음 주에 외출 나온 경비대원들을 무차별 폭행했다. 이들이 복귀하자 흥분한 1대대 병사들이 트럭 두 대에 나눠 타고 가서 경찰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 때문에 전남 지역에서는 경찰과 군대가 서로 틈만 나면 때리고 패는 보복이 이어졌고, 급기야 둘 사이에 총격전과 수류탄 투척이 오갔다. 6월 초에는 영암경찰서와 4연대 소속 하사관의 싸움으로 흥분한 군인들이 7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출동했고, 이를 막는 경찰은 기관총까지 동원해 사격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경비대 측은 6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쪽은 경찰이었다. 이들은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이 사건은 전라남도에서 군과 경찰 간의 갈등이 깊어지는 계기였고 좌익은 이를 노려 자신의 세력을 군 내부에서 더욱 확장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앞서 소개한 ‘제주 4·3 사건’은 이런저런 좌·우 사이의 충돌 양상이 수면 아래에서 물 밖으로 뿜어져 나온 상징적인 사례였다. 대한민국의 군대는 서서히 좌와 우의 극심한 대립과 충돌의 한복판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바다 건너의 제주도에서는 참혹한 살상(殺傷)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국군의 연대장이 좌익의 사주를 받은 하사관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군은 더 이상 이런 극도의 혼란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군은 이때를 놓치면 자멸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군은 내부의 적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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