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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동생 제거하라”오빠 잃은 정순왕후 정조에 복수 칼 겨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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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호 32면

장용영( 壯勇營) 내부 평면도. 정조 23년(1799) 제작됐다. 정조는 이율·홍복영 역모 사건에 구명겸이 연루된 의혹이 드러나자 새 호위부대인 장용위(壯勇衛)를 만들고 장용영으로 확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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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즉위 후 노론이 사실상의 임금으로 여긴 인물은 왕대비 정순왕후였다. 정조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노론은 인목대비 유폐를 명분으로 광해군을 내쫓은 서인의 적자였다. 정조는 일곱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법적인 조모를 깎듯이 모시는 것으로 쿠데타의 꼬투리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만족하지 않았고, 형제들과 함께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것을 후회하지도 않았다.

정조 10년(1786) 12월 1일. 정순왕후가 빈청(賓廳:회의실)에 내린 한 장의 언문(諺文) 전교는 누가 실제로 조선의 국왕인지를 묻는 듯했다. 정조는 만 24세의 성인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대비의 정사 관여 자체가 불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정순왕후의 언문 전교는 “여자 임금(女君)이 조정의 정사에 간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정순왕후는 “이 일은 오로지 종사를 위하고 성상을 보호하는 대의(大義)를 밝히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강변하면서 자신이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종사의 죄인이 될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선대왕의 영령이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정조실록』10년 12월 1일)라고 영조의 영령까지 끌어들였다.

정순왕후는 ‘5월의 변’과 ‘9월의 변’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정조 10년 5월에 문효세자가 죽고 9월에는 임신 상태였던 의빈 성씨가 또 사망한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정순왕후는 ‘흉악한 역적’ 홍국영이 “상계군(常溪君:이담)을 완풍군으로 삼아 가동궁(假東宮)이라고 일컬으면서 흉악한 의논을 마음대로 퍼뜨렸다”면서 홍국영과 상계군이 변고에 관련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홍국영은 정조 5년(1781)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상계군도 열흘 전인 11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바로 언문전교의 미스터리였다.

정순왕후 가례도감 의궤 중 한 장면. 영조는 66세의 나이로 15세의 정순왕후와 혼인했는데, 정순왕후는 이후 노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조의 가장 큰 정적으로 활동한다. 사진가 권태균

정순왕후는 ‘이 언문 전교는 대신만 보아서는 안 되고, 누구를 막론하고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을 토벌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홍국영과 상계군이 모두 죽은 가운데 ‘임금의 원수와 나라의 역적’이 누구인지 모호했다. 그러나 노론이 상계군의 아버지인 은언군 이인(李<4104>)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언문 전교의 과녁이 정조의 하나 남은 이복동생임이 드러났다. 정조 즉위 초 3대 모역사건으로 수세에 몰렸던 노론이 은전군을 죽이라고 대반전을 펼쳤던 것과 같은 정치공세였다.

영의정 김치인 등은 “이담(상계군)은 이미 죽었지만 화근(은언군)이 그대로 있으므로 지금 역적을 느슨하게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창하자 양사(兩司)는 “추국청을 설치해 내막을 캐낸 다음 시원스럽게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화답했다. 하나 남은 동생을 죽이라는 요청을 정조가 거부하면서 정순왕후는 단숨에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정조는 대비의 전교가 오빠 김귀주의 죽음에 대한 사적 복수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정조의 즉위도 방해했던 김귀주는 정조 즉위 직후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정조 8년(1784) 왕세자 책봉에 따른 특사령으로 감등돼 나주에 이배되었다가 정조 9년 죽었던 것이다.

정순왕후는 ‘내 오라비가 죽었으니 네 동생도 죽어야 한다’는 복수심에서 언문전교를 내린 것이었다. 노론은 연일 은언군을 죽여야 한다고 기세를 올릴 뿐 아무도 대비의 정사 관여가 불법이라고 지적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은언군의 혐의를 입증할 물증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정순왕후가 ‘은언군’이라고 적시하지도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영돈영부사 홍낙성(洪樂性)이 “자전께서 나라를 걱정하여 특별히 대의를 밝히셨는데 전하께서는 사사로운 은정으로 비호한다”고 비판하자 정조가 “자전께서 어찌 그(은언군)를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가?”라고 반박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자 홍낙성은 “감히 묻겠습니다. 자전의 분부가 이미 죽은 사람(상계군)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 다음 단계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라고 재차 반박했다.

그러나 법치국가 조선에서 아무런 물증도 없이 어림짐작으로 왕손의 목숨을 끊으라는 요구는 과한 것이었다. 정조가 자책하는 영의정 김치인에게 “나 역시 이러한 일을 모르는데 누가 전하고 누가 들었으며 자전께서도 어디에서 들으셨단 말인가?”라고 말하자 김치인은 “신들은 어두워서 전혀 몰랐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반드시 짐작하고 계실 줄로 여겼습니다”라고 응답했고, 정조는 “나도 사실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 정순왕후가 아무런 물증도 없이 정치공세를 펴는 것임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집권 노론은 정순왕후의 이런 억지를 모른 체 공세를 계속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나의 처지는 다른 사람과 다른데 지금 만약 또 서제(庶弟) 하나를 보존하지 못한다면…”이라고 울먹였으나 아무 소용 없었다. 은언군의 목숨은 졸지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이때 예기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면서 정국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12월 5일. 상계군의 외할아버지인 송낙휴(宋樂休)가 상복을 입고 대궐에 들어와 고변(告變:역모를 고발함)했던 것이다.

“담(湛:상계군)이 살았을 때 ‘김 정승이 살면 나도 살 것이고 김 정승이 죽으면 나도 죽을 것이다’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구이겸(具以謙)이 황해 병사로 있을 때 후한 선물을 바치고 편지에 자신을 소인이라고 지칭한 것을 일찍이 목격했습니다. 담은 평소에 병이 없었는데, 김 정승에 대해 말한 며칠 후 갑자기 죽었으니 의심스럽습니다.”

김 정승은 영의정까지 지낸 영중추부사 김상철(金尙喆)을 뜻하는데 노론이 경악한 것은 그보다 구이겸이 상계군과 결탁했다는 고변 때문이었다. 구이겸은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구선복(具善復)의 아들이었다. 구선복은 부친 구성필(具聖弼)이 병마절도사, 종형 구선행이 훈련대장과 병조판서, 아들 구현겸(具顯謙)이 통제사를 지낸 무반 명가였다. 또한 구선복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모는 데 직접 관여한 군의 숙장(宿將)이었다.

정순왕후와 노론이 정조를 거칠게 압박할 수 있었던 배경에 구선복 일가의 군권 장악이 있었다. 고변이 알려지자 구선복은 바로 훈련대장 직에서 해임되고 아들 구이겸은 국청으로 끌려왔다. 더구나 구이겸의 6촌 구명겸은 『정감록』 역모사건으로도 불리는 작년(정조 9년) 5월의 이율·홍복영 역모사건 때 서울에서 호응할 대장이 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때 구명겸은 무사했지만 위협을 느낀 정조는 그해 7월 새로운 호위부대인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해 경호를 강화했다. 구이겸이 상계군의 배후라는 고변이 나오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구명겸의 생질이 상계군의 모친이었으므로 노론으로서도 속은 쓰리지만 구명겸 공격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구명겸이 관련되었다는 증거가 여럿 드러났다. 구선복도 피해갈 수 없었다. 구선복은 국문 도중 “저는 모년(某年) 이후 용납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항상 의구심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라고 자백했는데, ‘모년(某年)’은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년(영조 38년)을 뜻하니 그 원죄가 끝내 자신의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구선복은 작년의 이율·홍복영 역모사건에도 깊숙이 관련됐음을 시인했다.

“을사년(정조 9년) 봄 삼도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 안에서 호응할 대장은 저의 조카 구명겸이었는데 이번 역모를 할 때 제가 시임 대장으로 스스로 주관해 반정(反正)한다고 일컬었습니다.”(『정조실록』 10년 12월 9일)

구선복이 자백하면서 그와 구명겸·구이겸은 모두 사형당했다. 정조는 구선복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재위 16년(1792) 윤 4월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면 홍인한보다 더 심했다”며 “매번 경연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라고 토로했다. 정조는 “그(구선복)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었다”고도 말했다. 극도의 인내로 정국을 파탄내지 않고 끌고 갔던 것이다.

정조는 재위 16년 5월 “역적 구선복의 일은, 그의 극도로 흉악함을 어찌 하루라도 용서할 수 있겠는가만 역시 그 스스로 천주(天誅:하늘의 주벌)를 범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죽였던 것이다”고 말했다. 부친을 죽음으로 몬 인물이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처벌하지 않고 스스로 법망에 걸린 후 처벌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정순왕후가 정조의 동생 은언군을 죽이기 위해 시작된 언문전교 사건은 노론 숙장(宿將) 구선복 일가를 몰락시키는 것으로 끝이 났고, 거꾸로 노론이 군부 한 축이 무너지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실로 하늘만이 알 수 있었던 대반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