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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아이폰 같은 신용카드 만들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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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애플은 음원과 콘텐트를 팔며 자신의 다른 기기에 대한 충성도와 회사의 수익을 높이는 새로운 사업환경을 만들고 있다. 기존의 휴대전화 사업 개념을 근본부터 흔들고 있다. 그동안 경쟁력은 선택과 집중이었고, 여기엔 ‘전문화’라는 말이 수반됐다. 하지만 애플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영역을 보완하며 매력적인 제품을 만들어냈다. 단말기·소프트웨어·콘텐트가 완전히 구분된다고 생각하고, 각각 그걸 잘하는 게 전문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아이폰의 성공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모든 사업은 시간이 흐르며 레드오션화한다. 아무리 열심히 경쟁사보다 잘하려 해도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럴 때 업의 정의를 바꾸는 혁신을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이다. 혁신을 일으킨 회사는 무한경쟁의 틀에서 벗어나 성장하고, 소비자는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맛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선 창조다.

스타벅스는 커피숍을 ‘커피 마시는 곳’에서 ‘문화를 마시는 곳’으로 바꾸었다. 문화를 입히면서 사람들은 비싼 가격에 늦은 서비스도 참고 어려운 주문표에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W호텔은 호텔을 머물거나 밥 먹는 곳이 아니라 파티하는 장소로 새롭게 정의했다. 에비앙은 설탕 넣은 물보다 안 넣은 물이 더 고급스럽다며 물병 갖고 다니는 풍속을 만들었다. 닌텐도는 게임기를 부모 몰래 갖고 노는 기계가 아니라 거실에 당당히 놓고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기계로 재정의해 게임을 양지로 끌어냈다.

이런 혁신 덕분에 삶은 더 풍요로워졌다. 혁신은 경영자의 상상력이 중요하지만 규제의 유연성도 필수조건이다. 만약 ‘휴대전화 업체는 단말기만 팔아야지 다른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제했다면 아이폰은 애당초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예로 신용카드사는 지불결제 수단으로서의 사업만 가능하지 부수업무는 매우 제한돼 있다. 그러다 보니 출판, 회원 라운지 운영, 오프라인 상품판매, 렌터카 운영, 보험판매 등 새로운 서비스를 추가하기 힘들다. 근본적으로는 카드업 자체의 진화를 시도할 수가 없다. 금융사의 본질을 흐리거나, 허가가 제한된 일을 한다거나, 중소사업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아닌데도 다양한 규제로 막혀 있다.

‘포지티브 시스템’으로 못박아 놓았기 때문에 사업을 재정의하며 발전하지 못하고 비슷한 회사들이 레드오션에서 무한경쟁을 하고 있는 꼴이다. 우량회원에 특화된 회사도, 서민에 특화된 회사도 없어 소비자들의 선택 폭이 좁다. 경쟁은 치열하나 엇비슷한 공급자만 있다. 비슷한 상품을 가지고 경쟁을 하다 보면 과잉경쟁이 유발돼 신용불량자 양산이나 업계 부실이 생기는 원인이 되곤 한다.

규제는 원래 사업의 발전을 막으려고 생긴 건 아니다. 규제를 만들 당시엔 무리가 없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오는 혁신의 폭까지는 상상할 수 없었을 뿐이다. 모든 규제를 10년 뒤 어떻게 튈지 모르는 산업 변화까지 미리 알아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산업의 진화에 따라 한 발짝 앞서 규제를 손질하는 일이다. 이러이러한 것만 하라는 포지티브 제도를, 이러이러한 것은 하지 말라는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바꾸는 게 그렇다. 이게 안 되면 허락하는 영역을 사안별로 늘려만 줘도 도움이 된다.

아이폰은 바로 이런 자유로운 사업환경에서 태동했다. 아이폰이 주는 충격을 단지 휴대전화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본다면 아이폰이 초래한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 트위터@diegoblu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