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중국청년대표단의 陶山書院방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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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하순 중국청년대표단의 한국문화고찰 일환으로 한국의 鄒魯之鄕인 안동의 도산서원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조선시대의 유생의 복장으로 사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퇴계 종택도 찾았다.이른바 朱子의 후손들이 동방의 朱子인 李子(李滉)의 후손을 만나고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유교문화를 실감한 셈이다.

중국역사에서 북방의 외침에 가장 취약했던 왕조가 宋朝였다. 後周 장군 趙匡胤은 군사정변을 통하여 왕조를 세웠지만 문신관료제를 채택함에 따라 문약한 정부가 되었다. 북방의 소수민족 거란(遼)에 이어 여진(金)은 송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포로로 잡아간다. 1127년 항저우에 남송이 건국되었지만 여진과의 화해냐 전쟁이냐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고 나라가 어지러웠다.

이러한 때 福建省 출신의 朱熹는 내우외환의 송왕조의 국가안보와 지배층 사대부의 충성심 제고를 위해 북송의 程호 程이형제에 의해 연구되어 온 유학을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시킨다. 주희는 性卽理라하여 인간이 타고 난 본성을 理로 파악하고 사대부는 자기수양을 철저히 하여 治世의 길에 나서야 함을 강조하면서 개인과 사회를 통합하는 사상을 性理學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고향 武夷山에 학교를 세워 국난의 시대를 맞아 제자들이 나아 갈 방향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몽고에 의해 남송이 멸망(1279)되고 元 明 淸代에서는 주자학이 과거과목으로 국가의 교학으로 인정되었지만 사대부들의 자기수양실천이 부족하였다.

고려 말 安珦은 당시 몽고 왜구등 이민족의 잦은 침략과 안으로는 최씨 무인집권과 불교의 폐해로 나라가 흔들릴 때 고려를 구할 새로운 사상으로 朱子의 성리학(朱子學)을 수입 보급하였다. 안향의 성리학은 고려를 구하지 못했지만 그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훗날 새로운 왕조 조선을 건국하게 되고 성리학은 국가 통치이념으로 조선 500년의 기틀이 되었다. 안향 사후 240년 周世鵬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안향의 고향인 順興 竹溪에 주자의 백록당서원의 이름을 따서 백운동서원을 만든다. 그 후 李滉도 풍기군수로 재직시 백운동서원을 위해 임금(명종)으로부터 무너진 교학을 중흥시키라는 뜻이 깃든 紹修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아낸다. 이황은 고향 陶山 兎溪에 은퇴하여 號도 退居溪上(퇴계)으로 짓고 성리학을 더욱 연구하고 도산서원을 통해 후학을 양성하였다. 조선의 성리학은 퇴계의 제자 율곡 李珥에 의해 더욱 발전한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은 조선의 성리학자 姜沆이 일본에 포로로 납치되어 2년 8개월간 체재하면서 일본에 성리학을 전수한다. 조선의 성리학은 하야시(林羅山)등에 의해 에도(江戶) 막부의 통치이념이 되었다가 나중에 막부를 뒤 업는 尊王論의 기초가 되고 明治維新후에는 조선의 성리학에 심취된 일부 군부에 의해 만주국 건국등 중국침략의 정신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중국청년대표들이 한국을 떠날 때 한국유교문화의 체험기념으로 퇴계와 율곡의 초상이 들어 있는 한국돈 천원지폐와 오천원지폐를 기념으로 가지고 돌아 갔는지 모른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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