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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제1부 질풍노도 제4장 暗鬪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정년(鄭年).
『삼국사기』에는 다른 이름 정연(鄭連)으로 표기돼 있는 장보고의 분신. 태어난 시기는 서로 달랐지만 죽을 때는 한날한시에 죽기로 맹세하였던 의형제 정년.
우르릉 쾅.
다시 번개가 번득이더니 곧이어 하늘을 찢는 천둥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밝아졌던 짧은 섬광 속에 지난 8년 동안 장보고가 일으키고 건설하였던 청해진의 모습이 일순 드러났다 다시 어둠 속으로 스러졌다.
아아.
장보고는 비를 맞으면서 탄식하였다.
"지금 내 곁에 정년이만 있다면, 지금 내 곁에 아우 정년이만 있다면. 정년이야말로 나의 고굉(股肱)인 것이다. 내 팔과 다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 있을까.
장보고는 엄청난 폭풍에 말갈기처럼 일어선 파도가 암벽을 강타하여 쏟아지는 물보라를 맞으며 생각하였다.
지금 아우 정년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형님, 형님은 형의 길을 가시오. 나는 나의 길을 가겠소."
언제였던가. 정년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 벌써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었다. 장보고는 군중소장을 끝으로 제대하여 평민으로 당나라에 사는 신라인들을 결속시켜 한창 장사에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헤어지면서 정년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예부터 장사는 미천한 천민들이나 하는 것이오. 나는 장사가 생리에 맞지가 않소이다. 나는 바닷가에서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말 위에서 죽고 싶소이다. 또한 나는 바다에서 태어났지만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 것 보다 칼과 창을 들고 전쟁에 나아가 싸우는 것이 더욱 더 마음에 맞소이다. 그러니 형님은 형님의 길을 가시오. 나는 나대로의 길을 가겠소."
정년이 선택한 길.
그것은 여전히 군문의 길이었다. 그러나 이미 당나라의 조정에서는 평로치청의 번군을 완전히 소탕함으로써 더 이상 관군이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비대화된 군벌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었던 것이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그때 장보고는 마지막으로 정년을 설득하여 말하였다.
"토끼가 잡히고 나면 사냥개는 삶아지게 되고, 높이 날던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도 쓸모 없어지며, 고기가 잡히면 통발은 버려지게 된다고 하였다. 너와 나는 오직 난적을 정벌하기 위해서 고용했던 사냥개이자, 활이며, 통발이 아니겠느냐. 이제 토끼는 잡혔고, 새도 사라졌으며, 고기도 잡혀 더 이상 전쟁도 없고, 따라서 우리는 쓸모가 없게 되었다. 마땅히 전쟁이 없을 때에는 창과 칼을 녹여서 보습을 만들어 땅을 갈아 씨를 뿌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정년은 눈을 부릅뜨고 말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또한 다음과 같이 하였소. 무신불석사(武臣不惜死), 즉 무인은 죽음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이오. 형님의 말씀대로 무인이라면 갖고 있던 창과 칼을 녹여서 보습을 만들 것이 아니라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창과 칼이 녹이 슬지 않도록 갈고 닦아놓아 언젠가 있을 전쟁을 대비해두는 것이 마땅한 무인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은 산동에 있는 적산촌(赤山村).
그곳에는 이미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法花院)이란 절이 있었는데, 이는 군문에서 제대한 장보고가 당나라에 살고 있는 신라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구심점으로 설립한 신라사찰이었던 것이다.
이 절에 대해서 일본 승 엔닌(圓仁)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개성(開成)4년(839년) 6월 7일. 정오 무렵 서북풍이 불었다. 돛을 올리고 나아갔다. 오후 2시에서 4시쯤 적산의 동편에 이르러 배를 정박하였다. 서북풍이 세차게 불었다. 그 적산은 실로 암벽이 높이 솟아오른 곳으로 산에는 절이 있어 그 이름은 적산법화원이다. 본래 장보고가 처음으로 지은 절이다. 오랫동안 장전(莊田)을 가지고 있어 식량에 충당하고 있다. 이 장전은 1년에 5백섬의 곡식을 수확하고 있다. 겨울과 여름에 강회가 있는데, 겨울철에는 법화경을 강설하고, 여름에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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