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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봇물 이룰 집단소송 사태 막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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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재계가 내년에 시행되는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를 '내년 이후 발생하는 분식행위부터 적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아직 과거 오류를 제대로 바로잡지 못한 상황에서 이 법을 소급 적용하면 쏟아지는 소송 때문에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할 수 없으니 이런 현실을 고려해 달라는 요청이다.

분식회계는 많은 국내 기업이 안고 있는 과거의 멍에다. 기업들은 과거 회계장부를 부풀리거나 줄이는 방법으로 실적을 포장했다. 정치권 압력 등으로 비자금을 만들 목적도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분식은 관행이었고 회계제도도 덜 엄격하고 모호했다. 그런데 제도가 하루아침에 달라진 데다 경기침체 등으로 '잘못된 과거 회계'를 바로잡을 형편도 안 돼 오늘의 상황에 처한 것이다. 전경련 조사 결과 86%의 기업이 분식회계로 인한 집단소송을 걱정하고 있다니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관행이라고 해서 과거 분식을 무조건 '없던 일'로 해달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집단소송제는 내년에 새로 시행되는 것인 만큼 과거 행위까지 소급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기업들은 반기업 정서에다 고유가, 환율 변화 등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런 판에 줄소송 사태까지 벌어진다면 투자 및 소비 회복, 일자리 만들기 등 경기회복을 위한 노력은 물 건너가게 된다. 무더기 소송에서 문 닫지 않고 살아남을 기업이 얼마나 될지도 의문이다. 집단소송제는 내년 이후 행위부터 적용해도 불법 행위는 막을 수 있으며 기업경영의 투명성은 제고될 수 있다. 또 과거 잘못은 기존의 다른 법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다.

과거 우리 경제의 구조적 약점 때문에 분식회계 등은 기업의 타고난 업보였다. 어떤 시점에 이를 털어버리고 새 출발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기업이 과거의 족쇄 때문에 항상 권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국회는 재계의 목소리를 수용해야 한다. 재계 역시 앞으로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때 철저한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