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한 단어로 축약한다면 그것은 단연 '조폭'일 것이다. 영화부터가 '조폭'의 대행진이었다. '친구'를 시작으로 '신라의 달밤' '엽기적 그녀' '조폭 마누라' '달마야 놀자' '킬러들의 수다' '두사부일체'…. 이들은 할리우드영화를 보기좋게 누르고 줄줄이 대박을 터뜨렸다.
영화계의 한때 유행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조폭 영화가 이렇듯 줄줄이 대박을 터뜨리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폭이 어떤 조직인가. 오야붕.꼬붕으로 대변되는 엄격한 상하관계,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시되는 집단의식, 법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의리와 연고, 그리고 이런 질서에 순종하는 데 따르는 얼마간의 권력과 금전적 보상-. 이것이 바로 조폭세계의 조직원리요, 내용이겠지만 실은 평범한 소시민들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어린 시절부터 체질화했고 지금도 우리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유교적 공동체의식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 대박영화 뺨치는'게이트'
그러나 단지 그런 친숙성만이 대박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왜 하필 올해 이렇게 조폭 영화가 줄줄이 기획됐고, 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는가 하는 데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의문은 마치 조폭 영화처럼 줄줄이 개봉되는 '게이트'들을 접하면서 풀린다. 지금까지 드러난 내용들만 봐도 현실은 영화를 뺨치고 있다. 권력과 금력과 주먹이, 동향과 동창의 연고주의와 지역커넥션으로 얽히고 설켜 빚어낸 사기와 협잡, 부정과 비리행각은 총격전만 곁들인다면 '대부' 못잖은 훌륭한 마피아 영화가 될 것이다. 조폭 영화보다 더 조폭적인 이런 현실이 올해 우리 사회에 조폭 신드롬을 가져왔고,그 조폭 영화의 대박에 단단히 한몫 했음을 의심치 않는다.
'게이트'에서 우리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아주 기분 나쁜 사실은 이제는 조폭이 과거처럼 유흥가에나 기생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유망한 벤처사업가, 골프장 주주, 기업인수 사업가, 증권투자가의 얼굴로 나타났다. 그들은 겉으로는 우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게이트 내용을 들여다 보노라면 이 사회 전체가 조폭 사회이고 우리들도 모르는 새에 그들의 먹이사슬의 한 부분이 돼 있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이 든다.
권력을 탐하는 부나비들이 선거철을 기다리듯 조폭들도 선거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선거철은 정치인의 계절이 아니라 실은 조폭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우리 선거에서는 공조직보다 사조직이 더 위력을 발휘하는데 이 사조직들 중 상당수가 바로 조폭이거나 조폭과 관련된 조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당이나 정치인들은 그들의 성격을 뻔히 알면서도 표를 얻기 위해 선거자금을 뿌리고 민원해결을 약속한다. 이런 관계가 선거 후에도 지속됨은 물론이다.
돈을 주어야 하는 건 지역의 소규모 조폭이고 기업화된 조폭쯤 되면 오히려 정치인에게 선거자금을 대는 후원자가 된다. 이들 가운데엔 아예 공조직인 지구당의 부위원장직을 맡아 활동하면서 선거 후의 더 큰 이권을 위해 과감한 '투자'도 서슴지 않는다.
선거 때의 정치와 조폭간의 이러한 유착과 커넥션은 영.호남의 구별도,여당.야당의 구별도 없다는 것이다.
*** 선거법 개정 등 대책 필요
해가 바뀌면 어쩔 수 없이 사회는 선거로 달아오를 것이다. 그 선거 열기 속에서는 조폭도 일반 유권자와의 구별없이 그저 표로만 보일 것이다. 조폭의 자금도 천문학적 자금이 소요되는 선거판에서는 그저 유용한 '총알'로만 여겨지기 십상이다.
바로 이런 '되고 보자'식의 선거전이야말로 조폭이 기생하고 번성하는 온상이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추세를 그대로 방치하면 조폭이 선거를 이용해 정치와 유착하고 합법적 세를 키워 일본의 야쿠자 수준으로 성장하는 것이 시간문제라고 한다. 맑고 투명한 선거를 위한 선거법의 개정 등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현재의 법과 제도로는 정치적 원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조폭 영화는 억압적인 현실의 탈출구 역할이나마 하지만 조폭 사회가 우리에게 안겨다줄 것은 부패와 불의와 폭력밖에는 없다. 조폭의 해는 올해로 영원히 안녕을 고해야 한다.
유승삼 <논설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