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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칼레의 시민’

중앙일보

입력 2010.05.25 00:50

업데이트 2010.05.25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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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로댕이 형상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칼레 시청 앞에 설치돼 있다. 칼레의 영웅 6인은 동포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목에 밧줄을 건 채 맨발로 길을 떠났다. 시장통에서 6인이 떠나는 모습을 본 시민들은 항복했다는 굴욕감, 그럼에도 대다수가 목숨을 부지하게 됐다는 안도감, 그리고 이를 위해 고귀한 신분의 시민 6인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자괴감으로 눈물을 흘렸다.

백년전쟁(1337~1453)은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가 발단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격파한 뒤 여세를 몰아 도버 해협에 면한 도시 칼레로 진격, 식량보급로를 끊고 포위했다. 11개월 동안 완강하게 저항하던 칼레는 식량이 떨어지자 1347년 마침내 항복했다. 항복 사절은 주민들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칼레 시의 완강한 저항에 분노한 에드워드 3세는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려 했지만 생각을 바꿔 한 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칼레의 지체 높은 시민 6명이 맨발에 속옷만 걸치고 목에 밧줄을 감은 채 성 밖으로 걸어 나와 성문 열쇠를 바치라는 것이다. 6명을 교수형 시키는 대신 주민들의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천천히 일어나 “내가 그 6명 중 하나가 되겠소”라고 말했다. 칼레 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였다. 그러자 뒤이어 시장·법률가 등 귀족 계급에 속한 5명이 동참했다.

다음 날 6인의 시민 대표는 시장통에서 에드워드 3세의 진지를 향해 출발했다. 시장통에 모인 사람들은 통곡을 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심한 자책감에 사로잡혀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눈에, 사라져가는 6인의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할 이미지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영국 왕은 그들의 처형을 명했다. 그러나 임신 중이었던 영국 왕비가 왕에게 장차 태어날 아기를 생각해 그들을 사면해달라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왕은 6인의 시민을 살려줬다. 기적 같은 반전(反轉)이었다. 동시대 사람인 프르와사르(1337~1404)는 사건의 전 과정을 연대기에 기록했다. 6인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다.

그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1884년,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은 칼레 시로부터 이들 위대한 6인의 모습을 형상화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6인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로댕은 10년 넘는 세월을 작품에 바쳐 1895년 완성했고, 작품은 칼레 시청 앞에 설치됐다. 시장통에서 떠나는 6인의 모습이다. 독일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극작가 게오르크 카이저(1878~1945)는 로댕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희곡 ‘칼레의 시민’(1914)을 썼다. ‘신의 손 로댕 전시회’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8월 22일까지 열린다. ‘칼레의 시민’도 왔다. 스폰서 검사들이 꼭 봐야 할 작품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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