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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9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염문도 처음에는 장보고가 일체의 해적행위와 노비매매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리자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장보고는 잡혀온 해적들을 엄중히 다스리고, 특히 노비를 팔고 사는 중간상인격인 서남해의 해상세력가들을 단호하게 처벌하였다. 기시우시(棄尸于市)라 하여서 죄인의 시체를 토막 내어 시장이나 길거리에 내거는 공개적인 처형방식은 예부터 독특한 신라인의 형벌제도였는데 중한 죄인은 이같은 방법으로 처벌하고, 비교적 가벼운 죄인은 독특한 형벌로 다스렸던 것이다.

그것은 다도해에 있는 수많은 외딴 무인도 속에 가둬버리는 이른바 투기원도형(投棄遠島刑)의 형벌을 내린 것이다. 완도 앞바다에는 1백50여개에 가까운 무인도가 있는데 이 섬에 넣어 가두는 입도형(入島刑)을 내리면 죄인은 절대로 헤엄쳐 바다로 빠져나올 수 없으며, 목이 마른 죄인은 마침내 무인도에서 홀로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극형이었던 것이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자란 장보고는 바다를 무대로 날뛰던 해적들과 노예상인들을 외딴 섬에 가둬버리는 독특한 형벌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바다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존재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인 것이다.

염문은 장보고의 결연한 의지를 유심히 지켜본 후 스스로 노예상인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노예무역은 포기하였으나 그는 몇개의 교관선을 갖고 있었던 상인이었으므로 그대로 무역행위는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주로 당나라로 '해수피'와 같은 가죽제품을 수출하고, 비단을 수입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소규모의 민간교역으로는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노예무역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큰 돈을 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호시탐탐 때를 노리던 염문은 마침내 흥덕왕 8년 봄.2년에 걸쳐 큰 기근이 들고 사방에서 벌떼처럼 도적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다시 부하들을 시켜 각 해안지방을 돌아다니며 먹고 살기 위해 내다 파는 자식들을 사들이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판소리극인 '심청전'에서 심청이가 공양미 3백섬의 값으로 중국선원에게 팔려나가듯 그 무렵에는 실제로 자손을 내다 파는 부모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선왕이었던 헌덕왕(憲德王)13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오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13년 봄에 백성들이 기근으로 인하여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자손을 내다 팔아 자활하는 자가 많았다.'

염문은 대담하게도 5년 동안 철통수비로 완전히 근절된 노예무역을 다시 재개한 것이었다. 염문은 자신의 배를 구조하여 갑판 위에는 해수피를 비롯하여 해표피.모피.피혁 등 가죽제품을 선적하고, 갑판 밑에는 은밀히 수집한 신라노예들을 태워 중국의 양주로 보내곤 하였다.

그 무렵 양주는 대운하와 장강하류의 요충지로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가 설치되어 대도독이 11개주를 관장하던 국제무역의 심장부였다.

신라의 무역상인들뿐 아니라 서방세계의 파사국(波斯國:페르시아), 점파국(占婆國:인도차이나), 대식국(大食國:아랍제국)상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무역항으로 이곳에는 이들의 거주지인 파사장(波斯莊)과 신라방, 그리고 화물집하장인 저(邸)등이 집중적으로 생겨나고 있던 것이다.

특히 이곳에는 십리장가(十里長街)라는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무렵 이 시장은 한밤에도 성시를 이루는 야시장으로 화려한 곳이었다. 이 십리장가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거리가 바로 노예를 사고 파는 인육시장이었다.

황제 목종(穆宗)의 금령으로 인육시장이 폐지되기까지 한때 이 시장에서는 페르시아를 비롯하여 아랍제국에서 끌려온 노예들은 물론 신라노들도 팔려나갔는데, 기록에 의하면 가장 인기있는 노예가 바로 신라노였고, 가장 값 비싸게 팔렸던 노예 역시 신라노였다고 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의 칙령으로 인육시장은 폐지되었으나 은밀히 이뤄지는 노예무역이 여전히 십리장가의 뒷골목에서 성행되고 있었다.

염문이 수집한 노비들은 바로 이 십리장가의 뒷골목에서 가장 비싼 가격인 최고가에 매매되고 있었던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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