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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제철인 딸기 5월이면 끝물,보관 쉬운 ‘제철 야콘’ 좋은 대용 과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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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호 09면

요즘 가장 고민스러운 것이 과일이다. 이 봄에 나오는 제철 과일이 없기 때문이다. 과일 가게에는 과일이 넘쳐나는데 무슨 소리냐고 의아해할 수 있겠지만, 단언컨대 이 계절에 제철 과일은 없다. 가을에 수확한 사과와 배는 이제 푸석푸석해지고 맛이 크게 떨어졌다. 겨우내 나오던 귤과 한라봉도 쭈글쭈글한 것들뿐이다. 봄에 잠깐 출하되던 금귤은 찾아볼 수도 없다. 한 해에 봄을 맞아 새로운 제철 과일이 나오는 것은 (귤 같은 독특한 작물을 제외하고는) 일러야 6월이다. 봄부터 굵은 열매를 맺는 식물이 있을 리가 없으니 봄에 과일이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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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나오는 새로운 제철 과일이란 다름 아닌 딸기다. 이야기가 이쯤 도달하면 우리는 맥이 빠진다. 딸기는 벌써 5월 중순에 끝물이었고, 이제 시장에서 거의 사라졌는데, 무슨 새삼스럽게 ‘새로운 제철 과일’ 운운하고 있느냐는 항의가 귀에 들릴 듯하다. 그러나 사전을 뒤져보라. 딸기는 5, 6월에 꽃이 피고, 개화한 지 35~40일이면 수확한다고 써 있다. 정상적으로 노지에서 딸기를 키웠다면 5월 하순은 딸기꽃이 막 지고 연둣빛 풋열매가 달려있을 계절이다. 그리고 5월 말과 6월이 되면서 딸기는 제철을 맞아 시장에 출하된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그랬다. 그때는 제철의 밭 딸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딸기 나오는 시기가 앞당겨지더니만 1990년대부터는 아예 한겨울부터 딸기를 함지박에 쌓아놓고 팔기 시작했다.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에 길가의 트럭에서 빨간 플라스틱 그릇에 딸기를 수북하게 쌓아놓고 파는 풍경은, 이제 전혀 낯설지 않다. 옛날 어느 효자가 눈 속에서 딸기를 땄다는 기적은 이제 최신 기술의 과학영농으로 이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 딸기를 어떻게 키웠을지 기가 막힌다. 서리가 내리면서부터 온실 안에 모셔두고 난방비를 어마어마하게 투여해 키운 딸기, 게다가 당도를 높이기 위해 첨단 영농기법이 동원된 딸기인 것이다. 그러나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런 딸기가 결코 비싸지 않다는 것이다. 첫 출하 때만 비쌀 뿐 3~4월에 이르면 그저 예전의 제철 딸기값보다 약간 비싼 가격을 유지한다. 그 엄청난 온실 유지비를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이런 딸기는 아무래도 향이 떨어지고 맛이 싱겁다. 당도는 종자개량과 첨단기술로 상당히 높여놓았지만, 딸기 특유의 향기와 신맛은 크게 떨어진다. 어떤 딸기는 이게 혹시 무화과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런 온실 딸기는 5월 초가 되면 벌써 끝물 티가 나기 시작하고 5월 후반에는 시장에서 사라진다. 그래도 이때 딸기가 좀 먹을 만하다. 같은 온실 딸기라 해도 조금씩 바깥바람을 쐬고 일조량도 늘어난 시기에 자란 것들이기 때문이다. 벌써 색깔부터가 다르다. 한겨울 딸기가 물감을 칠한 듯 반짝거리는 선홍색이라면, 5월의 딸기는 씨에서 금빛이 나면서 노란 기운이 도는 빨간색, 즉 금적색(金赤色)이다. 하지만 예전에 보던 6월의 밭 딸기에 비하자면 아직 멀었다.

제철 과일을 먹겠다는 신념으로 나는 겨울부터 봄까지 딸기를 사지 않았다(딱 한 번 손님 접대를 위해 샀다). 매해 과일 판매대 앞에서 군침만 흘리다가 독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짓을 무려 넉 달 넘게 반복한다. 면벽 수도, 묵언 수행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정작 6월의 딸기 철에는 딸기를 볼 수가 없다. 아니, 노지에서 키운 제철 딸기란 의미의 밭 딸기란 말이 사라졌다. 수행은 했건만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린 꼴이다.

그러고는 이제 또 철 이른 토마토와 참외가 지천이다. 토마토는 7월, 참외는 8월 중순이 돼서야 제대로 맛이 드는데 도대체 왜 봄부터 이렇게 참외를 먹어야 하는 걸까. 농민은 난방비를 들여 일찍 출하하지만, 이제 흔해지다 보니 그리 비싼 값도 받지 못한다. 소비자는 맛과 향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비정상적인 과일을 먹어야 한다.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우리는 왜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소비자는 시장에 나오니 사먹는다고 할 것이고, 농민은 소비자가 원하니 키운다고 할 것이다. 이 괴물 같은 시장의 욕망 메커니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 하다 못해 친환경 식품점에서라도 제철 과일을 주문해 생산하도록 독려할 수는 없을까. 제철 과일이 없는 봄에 나의 선택은 대용 과일이다. 가장 좋은 것은 야콘이다. 땅속에서 나는 고구마 같은 뿌리인 야콘은 11월에 수확해 일 년 내내 보관하며 먹는 야채다. 야콘은 생긴 것에 비해 아주 맛이 있는데, 배와 무의 중간쯤 되는 맛을 지니고 있다. 물이 많고 아작거리며 달착지근해 이 정도면 과일 대용으로 훌륭하다. 단맛에 비해 열량이 낮아 당뇨나 비만 환자에게는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게다가 농약이나 비료 없이도 잘 커 대부분 무농약이나 유기농 재배를 하니 웬만한 곳에서 사도 안심이다.

나는 인터넷에서 야콘 농장을 검색해 아예 한 박스씩 주문 구입해 놓고 먹는다. 아는 사람과 나누어 먹기도 하고, 냉장고에 두고 과일 생각이 날 때마다 하나씩 깎아서 먹는다. 과일샐러드나 야채샐러드 어느 쪽에 넣어도 잘 어울리니, 야콘을 채 썰어 새싹채소 등과 버무린 샐러드를 밥상에 올리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해 초여름에 청매실을 사다가 설탕에 재어놓았던 것을, 물에 타서 마시는 방법도, 좀 아쉽기는 하지만 쓸 만하다. 과일 씹는 맛은 없지만 과일 향, 과일 맛을 그럭저럭 느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일 간절기’를 버티면서 나는 다시 기다린다. 7월에 제철 토마토와 수박이 제철이 되기를. 아니, 언젠가 6월 밭 딸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기를.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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