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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고 김춘수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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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9일 타계한 대여(大餘) 김춘수 시인은 평생에 걸쳐 시 세계의 변모를 추구한 타고난 시인이었다. '대여'라는 호는 미당 서정주가 "'여(餘)'를 '나머지'라는 뜻이 아닌 '천천히'로 받아들이라"며 지어준 것이다. 대기만성하라는 뜻이었다.

고인의 시 세계는 대략 네 시기로 구분된다.

관념적 시쓰기에 빠졌던 1950년대가 그 첫 번째 시기다. 대표작 '꽃'도 이 시기에 쓰여져 59년 출간된 시집 '꽃의 소묘'에 실렸다. 생전 고인은 "'꽃'을 연애시로 생각해서 다들 좋아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사물은 이름지워야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온다는 점, 모든 인간은 숙명적으로 고독하기 때문에 유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밝힌 시"라고 밝힌 바 있다. 교과서에도 실렸던 국민적 애송시 '꽃'은 한 방송사 조사에서 연예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60년대 들어 고인의 시 세계는 언어 유희 같은 무의미 시로 빠져든다. 이후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전반까지 이미지에서 탈출하는 시기,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종교와 예술에 대한 성찰을 담담히 읊는 등 시 경향이 옮아간다.

김종길 시인은 고인의 그런 시력(詩歷)을 두고 "예술파라고 할까, 실험과 변신을 거듭했던 순수주의자이자 실험주의자였다"고 평했다. 덕분에 고인은 참여시의 좌장격인 김수영에 대비되는 순수시 계열의 대표격으로 꼽혔다.

22년 경남 통영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난 고인은 전형적인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김종길 시인은 "귀하게 자란 때문인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구석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다른 구석'은 종종 돌출행동으로도 나타나 경기중학교의 전신인 제일고보 5학년 때는 졸업을 불과 몇달 앞두고 일본인 담임 선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만으로 퇴학원서를 제출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대 예술과에 입학해 문예창작을 공부한 고인은 광복 후 고향에서 유치환.윤이상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예술운동을 전개했다.

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하며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해 '늪'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처용' '서서 잠자는 숲' 등 25권의 시집을 남겼고, 예술원상.대한민국문학상 등을 받았다. 또 영남대 문과대학장, 문예진흥원 고문, 한국시인협회장, 예술원 회원,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고인은 말년에도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펼쳐 지난해 가을부터 1년 간 각종 문예지에 발표한 16편의 시가 지난 여름 본사가 운영하는 제4회 미당문학상 1심을 통과하기도 했다. 또 지난 2월에는 자신의 문학인생을 정리한 5권짜리 '김춘수 전집'(현대문학)을 출간했고, 전집에 묶지 못한 시들을 모은 신작시집 '달개비꽃'과 산문집 한 권을 다음달 말 또는 내년 초 출간할 예정이었다.

고인은 투병 중이던 지난 11일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상금 300만원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장례식은 시인장으로 치러진다.

고인은 5년 전 사별한 부인 명숙경씨가 묻힌 경기도 광주 공원 묘지에 대표시 '꽃'과 함께 영원히 잠든다.

신준봉 기자

***우리 곁에 눈을 감고 계실 뿐입니다 - 김춘수 선생 영전에

지난 여름 선생님이 기도 폐색으로 갑작스레 쓰러지셨을 때 지난해 여름 어느 잡지에 발표하신 짤막한 시 '장미, 순수한 모순'이 떠올랐는데, 선생님은 왜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묘비명에 있는 시구를 제목으로 시를 남기셨는지 끝내 여쭤볼 기회도 없이 눈 감으신 채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우리 곁을 떠나시는군요.

"장미는 시간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있다. 언제 뜰까, 눈을."

미리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계신 듯한 이 시가 우리가 생전에 접한 선생님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의 타계 소식에 저희는 말없이 울 뿐입니다.

세상과 격절하신 채 노년을 보내신 분당 아파트는 선생님이 흠모해오던 릴케의 고독한 만년의 삶과도 흡사한 면이 많았습니다. 집안의 장식은 모두 떼어내고 서가에 그 많던 책도 모두 어디론가 치워버린, 마치 수도원의 노(老)수사가 혼자 사는 고절(孤節)의 분위기. 벽에 유일하게 걸린 액자에는 검은 산이 담겨 있는데, 단순히 검은 것이 아니라 오래 묵은 옻빛처럼 검은, 시인의 내면과 상응하는 그 산을 흙보다 검다며 아주 편안해 하셨지요.

선생님께서는 시 속에서 '스스로의 잠'을 결단하듯 자신의 시와 앞으로 있을 죽음을 예고해 놓으셨습니다.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다만 눈을 감고 있을 뿐"이라는 이 구절을 저는 이렇게 읽고 싶습니다. "시인은 죽지 않는다. 다만 눈을 감고 있을 뿐"이라고.

우리 현대시사에서 순수시의 한 광맥을 최후의 보루처럼 지켜오신 선생님이 안 계신 시단은 이제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빈자리가 너무 크게 다가옵니다. 삼가 선생님의 영전에 마음의 옷깃을 조심스레 여며봅니다.

선생님의 시는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

"시간이 어디론가 제가 갈 데로 다 가고 나면 그때/장미는 눈을 뜨며/시들어갈까."

조정권(시인)

<김춘수 시인의 삶>

▶1922년 11월 25일 경남 통영 출생

▶40년 일본 니혼(日本)대 예술학원 창작과 입학

▶42년 일본 천황과 총독정치를 비방해 7개월간 헌병대와 경찰서에 유치. 니혼대 중퇴.

▶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 출간

▶59년 시집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출간

▶60~78년 마산 해인대(경남대 전신), 경북대 문리대 교수

▶74년 시선집 '처용' 출간

▶79~81년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81년 제11대 국회의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83년 문예진흥원 고문, 신문윤리위원

▶86년 '김춘수 시전집'(서문당) 출간

▶86~88년 방송심의위원장, 한국시인협회장

▶88년 시집 '라틴점묘 기타(其他)' 출간

▶89년 시론집 '시의 이해와 작법' 출간

▶97년 시집 '들림, 도스토예프스키', 장편소설 '꽃과 여우' 출간, 제5회 대산문학상 수상

▶98년 제12회 인촌상 수상

▶99년 시집 '의자와 계단' 펴냄, 부인 명숙경 여사와 사별

▶2002년 사화집 '김춘수 사색사화집', 시집 '쉰한 편의 비가' 출간

▶2004년 '김춘수 전집'(현대문학) 출간,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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