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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에 그리스어 공부한 인문학의 천재 존 스튜어트 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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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존 스튜어트 밀(1806~1873)과 해리엇 테일러 밀. 밀에게 아내는 ‘칼라일보다 훌륭한 시인이요, 나보다 뛰어난 사상가, 내 생애의 영광이며 으뜸가는 축복, 내게 하나의 종교이자 가치의 근본이며, 내 생활을 이끌어 가는 표준’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뿐만 아니라 사상도 함께 나눴다. 밀은 대표작인 『자유론』도 두 사람의 합작품이라고 공언했다.

어떤 분야건 나이가 많아질수록 숙달되는 법이다. 하지만 나이와 전혀 상관없는 분야가 셋 있다. 바둑·수학·음악이다. 10대 중반 정상권에 진입하기 시작한 바둑 천재 이창호, 12세에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임을 혼자 깨친 수학자 파스칼, 5세에 작곡을 시작한 모차르트 등이 떠오른다. 이 세 분야는 나이가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게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하지만 인문학은 정반대다. 인생의 경험을 쌓은 뒤에야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분야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19세기 영국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조숙한 인문학의 천재였다. 1806년 5월 20일 태어난 밀은 공리주의 사상가였던 아버지 제임스 밀의 교육을 받았다. 밀의 아버지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모든 교육을 직접 맡았다. ‘홈스쿨링’을 한 셈이다. 밀은 3세 때 그리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스어-영어사전’이 없던 시절인지라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일일이 질문해야 했지만, 아버지는 이 성가신 일을 묵묵히 견뎠다. 그 무렵 밀은 에드워드 기번, 데이비드 흄 같은 18세기 역사가·철학자의 저서를 읽으면서 아버지로부터 문명·정치·도덕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유치원 다닐 나이에 대학 수준의 인문학 강의를 수강한 것이다. 밀은 8세부터 라틴어 공부를 시작했고, 그 후 12세까지 그리스·로마의 주요 고전을 원전으로 읽었다. 읽기만 한 것이 아니다. 습작이긴 했지만 12세의 나이에 여러 권의 역사책을 쓰기도 했다.

철저한 ‘주지주의’ 교육은 부작용을 낳았다. 밀은 20세부터 극심한 ‘정서적 갈증’으로 인한 정신적 위기를 겪는다. 그는 이때부터 시와 예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베버·모차르트의 음악, 워즈워스·콜리지의 시, 괴테·칼라일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24세 되던 1830년에는 해리엇 테일러란 여성을 소개받아 만나기 시작했다. 밀은 그녀에게서 비범한 ‘감성적 능력’을 발견한다. 당시 23세였던 테일러는 결혼 4년째였고, 두 아이를 둔 유부녀였다. 밀의 친구 존 테일러의 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20년이 넘도록 교제했다. 당연히 세상은 시끄러웠다. 존 테일러가 죽은 뒤 밀의 나이 45세가 되던 1851년 4월,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했다. 그러나 기다린 세월에 비해 행복의 순간은 너무나 짧았다. 1858년 두 사람이 남프랑스를 여행하던 중 아비뇽에서 아내가 병사했다. 결혼한 지 7년 반 만의 일이다. 1873년 밀은 아비뇽의 아내 곁에 나란히 잠들었다. 바야흐로 찬란한 5월, 입시에 시달리는 우리 아이들의 지성과 감성도 두루 건강했으면.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