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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형 변신 중견 조폭들 하나 둘 뭉쳐 ‘그룹’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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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지난해 10월 서울 여의도의 한 고급 연회장. 검은색 양복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남성 수십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서울 영등포 지역의 폭력조직인 중앙동파·시장파·남부동파·북부동파의 두목과 조직원이었다. 중앙동파 조직원 어머니의 칠순 잔치를 빙자해 회합을 연 것이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앞으로 단합해 행동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요즘 폭력조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검찰과 경찰에 따르면 중견 폭력조직들이 신디케이트(syndicate·조합) 형태로 연합하며 상호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현재는 느슨한 연합체이지만 거대 단일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어 검경이 주시하고 있다.

경찰에서 25년간 조폭 수사를 했던 안흥진 경찰수사연수원 교수는 “전국단위 연합은 당분간 어렵겠지만 지역단위 폭력조직끼리 통합과 연계는 아주 긴밀해지고 있다”며 “이권사업에 따라 합종연횡이 계속되는데 단일 조직으로 통합될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KB(강북)파는 2008년 인천·부천·광명·시흥 등 수도권 일대의 폭력조직들이 연합해 만들어졌다. 30~40대 간부급 150여 명이 매달 지역을 돌아가며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 수사 당국은 KB파가 최근 재개발사업에 공동 투자해 큰돈을 벌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KB파는 또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컴퓨터 전문가를 고용해 경쟁 사이트를 해킹하거나 경쟁업체 운영자를 협박해 사이트를 폐쇄하게 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서울 미아리·부산·전주 등지에서 폭력조직들 간의 신디케이트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조직 범죄는 갈수록 치밀해지고 있지만 수사는 더욱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폭력조직들의 수입원이 전통적인 유흥업소 운영이나 업소 갈취에서 벗어나 상가 분양·인수합병 등 합법을 위장한 사업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폭력조직들도 수사기관의 단속에 신경 쓰고 있다. 예전처럼 눈에 보이는 폭력을 행사하다 검경의 타깃이 되면 자칫 조직이 와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산 원주민파는 조직원들에게 경조사·회식 등 조직 내 행사에 참석할 때 수사기관의 동태 파악에 걸리지 않도록 행동을 주의하라는 지침을 내릴 정도다.

요즘 조폭들은 다른 조직과 분쟁이 생길 경우 ‘전쟁’보다는 대화를 선택한다. 고양·일산의 스포츠파는 지난해 대전의 폭력배가 구역을 침범했지만 이들과 협상을 통해 사과를 받아 내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2008년 이태원 유흥가 일대 두 조직이 합쳐져 만들어진 이태원파는 덩치와 흉터가 있는 전통적 조폭형이 아닌 호남형 외모를 기준으로 조직원을 뽑았다.

조병인 형사정책연구원 범죄예방센터장은 “1990년대 ‘범죄와의 전쟁’으로 조직 범죄가 수그러들었지만 다시 불거질 수 있다. 함정수사·잠입수사와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 미리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조직범죄와 형사법』을 쓴 성균관대 박광민(법학) 교수는 “조직 범죄에서 함정수사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말했다. 

이철재·홍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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