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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식인 지도] 인지과학의 선구자 대니얼 데닛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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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인간의 마음만큼 우리에게 친근하면서도 그토록 오랫동안 신비의 대상으로 여겨진 것도 없을 것이다. 감각의 파노라마가 연출되기도 하고, 온갖 느낌이 교차하기도 하며, 때로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기도 하는 마음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마음의 현상은 두뇌에 기반을 두고 있음이 틀림없을 텐데, 도대체 신경세포의 '물'에서 어떻게 마음의 '포도주'가 만들어지는 것일까. 마음은 물질과 근본적으로 다른가? 다르다면 물질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신비의 베일을 벗기고 마음을 물질계에 포섭시킬 수는 없을까. 이 질문은 철학의 초창기부터 철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지금까지도 그 관심은 지속되고 있다.

20세기 후반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조류가 형성되면서 자연과학의 예봉을 비껴가던 마음에 대한 탐구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컴퓨터 과학이 발전하면서 세계를 이해하고 그에 관한 정보를 처리하는 인공적인 체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인간의 마음도 결국 컴퓨터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확산된다.

이러한 혁명적 사고방식이 많은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인간의 마음을 해명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던 철학자.인지심리학자.신경과학자.언어학자들이 연구에 동참하게 된다. 인지과학은 이렇게 컴퓨터 과학을 모태로 해 마음에 관심을 갖는 인접학문들이 결합하면서 구성된 학제(學際)연구로 탄생하게 된다.

대니얼 데닛은 인지심리학.신경과학.진화생물학 등에 대한 포괄적 연구를 토대로 해 인간의 마음의 본성을 탐구하는 미국 철학자로, 철학 분야에서 인지과학을 선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인지과학자로서의 데닛의 공헌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마음을 컴퓨터와 같은 것으로 본다는 인지과학의 기본적 입장의 의미를 명료히 제시한 것이고, 둘째는 이러한 입장에 대한 반론들에 대응하면서 마음에 관한 자기 나름의 철학적 견해를 발전시킨 것이다.

***인지과학 기본틀.철학 제시

우선 데닛이 해명하는 인지과학의 기본적 틀을 살펴보자. 이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 과정은 계산기가 문제를 푸는 과정과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한 사람이 나무를 보게 되면 우선 그의 망막에 일정한 영상이 맺히고, 이 영상은 두뇌를 거쳐 '저것은 나무다'라는 판단을 산출한다. 여기서 망막의 자극은 계산기의 자판을 누르는 것에 대응하고, 두뇌를 거쳐 산출된 판단은 계산기에서 계산 결과 화면에 나타나는 답에 대응한다.

계산기에서 자판을 누르는 입력과 화면의 출력은 일정한 프로그램을 통해 매개되듯이 인간의 마음도 일정한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체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마음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컴퓨터보다도 복잡하며, 단순한 연산뿐 아니라 여러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복합적 구조를 지닌 자동차가 그 부품들을 만드는 여러 체계들이 조직적으로 연계돼 만들어지듯이 복잡한 문제를 푸는 마음은 단순한 문제를 푸는 계산기들이 조직적으로 연계돼 만들어질 뿐이다.

***급진적 과학주의 입장 견지

컴퓨터 과학에 영감을 받은 데닛 등의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마음에 대한 기계론적인 견해는 초창기부터 많은 반론에 부닥친다. 마음을 컴퓨터로 보는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음은 단지 문제를 해결하는 지능만 갖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일정한 방식으로 그려내기도 하고, 또한 세계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감각.통증.기쁨 등의 온갖 느낌을 동반하는 상태들이 출현함에 주목한다. 이러한 의식과 표상의 현상은 마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며 단순히 지능적인 계산을 수행하는 컴퓨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그 일부인 지능만이 기계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뿐 전체적으로는 끝내 물질계에 포섭되지 않는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는가? 데닛은 이러한 도전에 대해 철저히 과학주의적인 급진파의 입장을 밀고 나간다.

데닛은 인간이 진화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아메바에서 영장류에 이르는 계열 중 과연 어떤 단계에서 유기체는 세계를 일정한 모습으로 표상하는 능력에 도달하게 되는가? 데닛은 이 질문은 대답될 수 없는 질문임을 지적한다.

이러한 통찰에서 출발해 데닛은 세계의 특정한 모습을 믿는다든가, 특정한 상태를 바란다든가 하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실재하는 것으로 보고 그에 대응하는 두뇌의 대응물을 찾으려는 시도를 무익한 것으로 단정한다.

인간은 단지 외부의 자극에 대응해 행동하는 복잡한 메커니즘에 불과하며 과학은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믿음.욕구 등을 가정하는 것일 뿐이다.

물리학에서 우리에게 관찰되는 경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중력.양자.전기장 등을 가정하여, 이들이 실재하는지를 묻는 일은 이들의 존재를 가정했을 때 경험 현상이 잘 설명되는지 따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듯, 믿음.욕구 등의 심리상태도 단지 자극에 대한 인간의 체계적인 행동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가정된 도구에 불과하므로 그에 대해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온갖 느낌을 동반하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의식에 대하여도 데닛은 일관된 과학주의의 태도를 견지한다. 그는 의식과 관련한 신경생리학의 여러 연구를 토대로 해 서구 지성계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데카르트적인 자아관을 정면으로 공격한다.

데카르트적인 관점에 따르면 우리의 두뇌는 세계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여 이를 처리하고, 어느 단계에서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만들어 낸다.

이 그림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 스크린에 비추이듯이 우리의 의식에 투영되고, 자아는 의식의 그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 데닛은 이러한 완성된 모습으로 의식에 주어지는 것의 존재를 부정한다. 예를 들어, 이전에 내가 좋아하지 않던 청국장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를 보자.

청국장의 맛은 그대로인데 그에 대한 나의 태도가 달라진 것인가, 아니면 청국장의 맛이 나에게 이제 다른 느낌으로 나타나는 것인가? 이 질문 역시 대답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 데닛은 의식에 관한 발상의 전환을 제안한다. 의식의 상태란 우리의 두뇌를 이루는 여러 체계들이 세계에 관한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각기 불완전한 상태로 제시하는 것이며, 이는 특정한 완성 단계에 들어가지 않은 채 여러 하부체계에 의해 지속적으로 편집되고 수정된다는 것이다. 이런 그림에는 데카르트적인 독립적 자아의 존재는 없으며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 같은 것도 없다.

***"지나친 기계론" 반론도 많아

현대 심리철학의 가장 과격한 급진주의자인 데닛은 마음으로부터 모든 전통적인 신비의 옷을 벗기려 한다. 지능을 컴퓨터에 의해 물질계에 포섭시키고, 의식의 자아를 개별적인 정보처리장치들에 분산 해체시키며, 세계를 표상하는 특성을 행동의 설명을 위한 단지 이론적 도구의 위치로 이전시키려 한다. 우리는 데닛의 급진적 과학주의에 동의할 수 있을까.

그의 입장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데닛이 마음의 지위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반드시 귀기울일 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는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

*** 대니얼 데닛은…

▶1942년 미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출생

▶63년 하버드대 졸업

▶65년 영국 옥스퍼드대 박사

▶현재 미 터프츠대 석좌 교수.인지과학센터 소장

*** 저서(미번역서)

▶내용과 의식(Content and Consciousness.69년)

▶브레인스톰(Brainstorms.78년)

▶활동범위(Elbow Room.84년)

▶지향적 입장(The Intentional Stance.87년)

▶의식의 설명(Consciousness Explained.91년)

▶다윈의 위험한 생각(Darwin's Dangerous Idea.95년)

▶여러 종류의 마음(Kinds of Minds.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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