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특집 김장] 손맛 찾아 사연 찾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2면

"김치는 뭐니 뭐니 해도 손맛이래요." "아니랑게, 푹 우려낸 젓갈이 중요허구먼."

"배추가 실하고, 간이 맞아야제" "그저 맛있으면 되지,뭐가 그리 중요하남유."

사투리만큼이나 지방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 바로 김치 맛이다.

젓갈 냄새 그윽한 남도의 갓김치, 깔끔한 뒷맛의 서울 깍두기…. 한 젓가락 집어 들기만 해도

어쩜 이다지도 그 지역스러울까 하는 생각이 든다.

week&이 손맛 찾아 사연 찾아 전국의 '김치 명인'들을 직접 만났다. 김치의 종류만큼이나,

오랜 시간 숙성된 세월만큼이나 다양하게 곰삭은 우리네 이야기가 있었다.

◆서울 : 성은 입은 곤쟁이 젓 - 감동젓무김치

'감동젓무김치'라고 들어보셨는지. 감동젓으로 담근 김치를 말하는 것 같긴 한데, 감동젓이란 젓갈이 있기나 한지.

사실 그런 젓갈은 없다. 감동젓무김치는 새우보다 조금 작은, 곤쟁이를 푹 삭힌 젓갈(작은 사진)로 만든 깍두기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 '곤쟁이젓 깍두기'가 이처럼 우아한 이름을 갖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진상품으로 올라온 이 깍두기 맛에 감동받아 초라한 원래 이름 대신 앞으론 '감동젓무김치'라고 부르라 명했다는 것. 수라상에 올랐던 만큼 그 속에 낙지.전복까지 넣었으니 당시 서민들은 국물조차 맛볼 수 없던 '럭셔리 김치'인 셈이다.

오늘날 이 김치의 맛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이가 바로 서울에서 30대째 살고 있는 김숙년(70.여.(上))씨다. 조선 인조 때 예조판서를 지낸 청음 김상헌의 자손으로, 순조임금의 둘째딸 복온공주가 6대조 할머니이기도 한 토박이 중의 토박이. 이 김치의 유래도 할머니들을 통해 전해왔다고 했다.

곤쟁이는 새우처럼 생겼으나 이보다 작고 자줏 빛을 띠어 자하(紫蝦)로도 불린다. 그래서 곤쟁이젓으로 김치를 담그면 새우젓을 썼을 때보다 더 진한 빛을 낸다. 지금쯤 담가 한달 이상 푹 삭힌 뒤 섣달 그믐이나 정월에 꺼내 먹기 때문에 야들야들한 배추보다 무를 쓰는 것이 더 낫다. 굳이 배추를 넣는다면 빳빳한 씨도리나 배추의 노란 속대 부분이 좋다.

젓갈은 곤쟁이 자체가 워낙 잘기 때문에 따로 다질 필요없이 그냥 양념을 해 버무리면 된다. "흙냄새 감도는 특유한 향이 나면서도 너무 진하지 않고 끝맛이 깔끔하기 때문에 서울 깍쟁이들 입맛엔 딱"이라고 덧붙였다.

40명이 넘는 대가족을 거느렸던 증조할머니.할머니.어머니에게서 요리법을 전수받았다는 김씨. 3년 전 이를 바탕으로 서울 음식과 관련한 책도 냈다. 계절음식.밑반찬 수백 가지를 소개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자신있고 또 좋아하는 것이 바로 감동젓무김치. 자식.손자들 역시 집에 찾아오면 제일 먼저 이 김치를 달라고 한단다. 오죽하면 가족들에게 "나 죽으면 제사상에 뭐 놓을래" 하고 물었더니 초등학생이던 둘째 손녀가 대뜸 "흰 쌀밥에 감동젓무김치 팍팍 비벼 올리겠다"고 했다나.

김씨는 감동젓무김치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으로 떡국을 꼽았다. 그래서 항상 설 때가 되면 김씨가 대접해 주는 떡국과 감동젓무김치를 먹으려는 세배객으로 넘쳐난다고. 한 고위층 인사로부터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을 상대로 국빈 전용 음식점을 내 보라는 제안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평생을 고교 교단에 섰던 터라 장사는 할 줄 모른다며 거절했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없기에 배우고 싶다는 이들에겐 아낌없이 노하우를 가르쳐준다. 대학교수.요리학원 원장부터 일반 주부까지 수제자들만 40명이 넘는다는 김씨. 그는 "내가 전수받은 별미 김치가 제자들을 통해 널리 퍼져나간다면 그 또한 보람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글=김필규 기자<phil9@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 강원 : 일본까지 소문 쫙 - 양양 명태김치

김치와 해산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찰떡궁합이다. 양념 단계에서 새우젓.멸치액젓 등이 쓰이기도 하지만 속 만들 때 씹히는 맛을 내려 굴.북어까지 들어간다. 그러나 생선 곤 국물로 맛을 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명태의 살점이 다 떨어져 녹아버리도록 푹 삶은 진국을 액젓 대신 넣는다. 강원도 김치가 이렇다. 이름하여 '명태김치'((右)). 여기에 싱싱한 명태를 뼈째 썰어 김치에 절여 넣으면 '명태 속박이 김치'가 된다.

"요즘은 명태가 비싸니까 잘 안 담그지. 어렸을 땐 김장철만 되면 집집마다 명태를 주렁주렁 걸어놓고 명태김치를 담갔어요."

강원도 양양군 전 생활개선회장 진금수(50.여)씨. 친정 어머니에게서 전수받은 김치 솜씨가 주변에 소문나 도내 행사가 있을 때마다 단골로 진씨를 모셔간다. 지난해 일본 롯카쇼 촌에서 김치 만드는 법을 배우려고 찾아 왔을 때도 특별강사로 활약했다. 이때 직접 담가 본 김치를 가져가 맛을 본 일본인들이 "김치 맛의 진수"라고 극찬하며 전화해 오기도 했다. 명태김치의 핵심은 양파.생강.마늘 간 것에 새우젓과 명태 고운 국물을 넣어 만드는 양념. 푹 고운 국물을 체에 걸러 식힌 뒤 넣는다. 명태 특유의 향이 김치 가득 풍기면서도 비릿하지 않고 담백한 게 특징이다. 김치 속에 송송 썰어 넣은 명태는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노글노글해져 뼈째 씹어먹을 수 있게 된다.

진씨에게 다른 지역 김치 맛과 비교해 달라고 했더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연 양양 김치가 최고"란다. 단지 명태 국물이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다. 강원도 고랭지에서 나온 무.배추를 맑은 남대천 물에 씻어 만드니 이미 재료 단계에서부터 맛의 승부가 결정난다는 이야기다.

양양=김필규 기자<phil9@joongang.co.kr>

◆ 전라 : 톡 쏘며 아삭아삭 - 돌산 갓김치

전남 여수 시내에서 차로 3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섬. 아치형의 다리를 건너면 길은 곡예하듯 꼬불꼬불하다.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봉우리가 불쑥 앞을 막아선다. 이래서 '산이 갑작스레 나타난다'는 뜻의 돌산(突山)이란 이름을 가지게 됐나.

국내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섬이지만 보통 사람에겐 그리 낯익지 않았던 돌산도. 그런데 최근 '갓김치' 덕분에 유명해졌다.'웰빙' 바람 속에 콜레스테롤 수치를 떨어뜨린다는 갓김치의 효능 덕도 있지만, 돌산 갓김치는 분명 다른 지역과 다른 독특한 맛을 낸다.

"난 여기서 태어나 자랐응께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톡 쏘는 맛이 적다고 합디다."

돌산읍 죽포리의 정윤자(52.(左))씨. 그녀는 손수 밭에서 갓을 재배해 김치를 담그는 이 지역 500여 가구 중에서도 가장 손맛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나라고 뾰족한 방법이 있나. 동네 사람들은 다 똑같이 담그는디…."

우선 갓김치하면 떠오르는 매운 맛이 돌산 갓김치엔 왜 적은지 궁금했다.

"그건 날씨 때문일껴. 여긴 5년에 눈 한번 보기가 쉽지 않아. 따뜻한 해양성 기후에 땅은 알칼리성 사질토라 딴 데 갓보다 부드러워. 재료가 좋아서지." 어쩌면 아낙네들이 부르는 전통민요 아리랑 가락에 갓 특유의 맵고 쓰고 떫은 맛마저 부드러워졌는지 모른다.

양념도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다. 젓갈은 커다란 통에 1년간 숙성시킨 멸치젓을 쓴다. 보통 김치에 마른 고춧가루를 넣는 것에 비해 돌산 갓김치는 물에 불린 이른바 '물고추'를 넣는다. 시원한 맛을 내기 위해 곱게 간 생새우를 넣는 것도 필수 과정.

"내가 9남매 중 여덟째였는디, 어릴 적 이맘때엔 온 가족이 함께 김장을 담갔지라. 아버지는 유독 내가 만든 게 맛있다며 '윤자 껀 따로 둬' 하셨제. 나만 이곳에 남은 걸 보면 뭔가 질긴 게 있긴 있나벼." 갓김치를 한 봉지 내미는 정씨의 손이 절인 갓처럼 가칠가칠하다.

여수=최민우 기자<minwoo@joongang.co.kr>

◆ 경상 : 한잎 한잎 고른 손길 - 함양 깻잎김치

열두 남매의 맏아들에게 시집간 열아홉 살 처녀는 엄한 시어머니 아래서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했다. 맏며느리로 제삿날 온 정성을 다해 음식을 차려도 시어머니에게서 돌아오는 건 "넌 어찌 그리 손맛이 없느냐"는 냉랭한 반응뿐. 호된 꾸지람이라도 받는 날엔 뒷산에 올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게 다 며느리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이제 당신도 두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가 되고 나서란다.

경남 함양에서 깻잎 김치의 장인으로 불리고 있는 홍순명(64.(左))씨. 그녀는 이제 어엿한 사장이다. 25년 전 '산수 식품'이란 간판을 내걸고 시작한 김치 장사는 지금 15명의 직원을 둔 내실 있는 사업체로 성장했다. "전 원래 음식 솜씨가 없었어요. 다 시어머니한테서 어깨 너머 배운 것을 재연하다 보니…."

처음엔 깻잎 부각이었다. "TV를 보는데 다시마.김 부각이 인기라는 뉴스가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매일 먹는 깻잎 부각을 상품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직접 나섰죠." 라면 두 박스에 깻잎 부각을 가득 담아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문턱 높은 백화점과 유통 업체를 찾아가 "한번 맛 보슈"라고 배짱을 튀기며 툭 던져 놓고 돌아섰다. "웬 시골 아줌마가 저리도 호기롭게 나오나 신기해 하더군요. 돈을 벌자고 시작한 일이 아니어서 아쉬운 게 없었던 것 같아요." 일주일쯤 지나 몇몇 유통 업체로부터 납품하라는 요청이 왔다. 5년쯤 지나 유통망이 확실히 자리잡자 본격적으로 깻잎 김치를 만들게 됐다.

맛의 비결은 멸치 젓갈에 있다. 삼천포나 통영에서 사온 생멸치를 커다란 솥에 담아 장작불에 부글부글 끓인 뒤 거기서 나온 국물에 들깨.마늘.고춧가루 등 갖은 양념을 넣는다. 영양을 고려해 최근엔 채 썬 밤을 넣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한 뭉텅이를 양념장에 푹 담그지 않고 깻잎 하나하나마다 양념장을 발라요. 양념이 골고루 배도록 한 것이지만 그만큼 정성을 들여야 좋은 음식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것도 다 어머니로부터 배웠어요."

함양=최민우 기자

◆ 충청 : 초정 약수로 우린 맛 - 청주 동치미

"전 김치 장인도 아니고 그저 장사꾼일 뿐입니다."

검게 그을린 얼굴, 짧게 올린 스포츠형 머리, 영 어색하기만 한 넥타이와 감색 정장. 영락없는 농부의 외모임에도 본인은 굳이 장사꾼임을 강조한다. 그런 솔직함 때문에 오히려 신뢰가 가는 걸까.

충북 청주에서 김치 전문업체 '썬프레 김치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장장원(42.(左)) 사장. 4년 전 김치 사업에 뛰어든 그는 최근 야심작을 내놓고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이름하여 '초정 약수 동치미'.

"청주에서 태어나 자라 김치로 먹고 살면서도 충청도를 대표하는 김치가 없는 게 못내 아쉬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역적 특성을 살릴 수 있을까 궁리하다 초정 약수와 결합시켰죠."

양념만큼이나 물도 중요하다는 게 그의 김치학 지론. "보통 우리가 마시는 물은 광천수인데, 초정 약수는 국내 유일의 탄산수거든요. 미네랄 성분이 풍부해 소화기능도 도와주고, 노폐물 제거에도 그만이죠. 물론 동치미 국물은 탄산 음료처럼 톡 쏘는 맛은 없답니다."

재료는 3년간 비료를 전혀 안 쓴 유기농 재배 무를 고집한다. 처음엔 흙이 묻은 무를 일반 물로 세척한 다음 소금을 탄 약수에 12시간 정도 절인다. 이를 꺼내 다시 한번 씻은 뒤 새로운 약수에 무와 함께 고추.파 등을 넣으면 완성.

동치미 국물을 한번 떠 먹어보았다. 워낙 갖가지 양념이 많이 든 동치미를 먹어 본 탓일까. 혀 끝에 닿은 첫 맛은 밍밍했다. 몇 숟가락 떠먹다 보니 조금은 깔끔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반면 무는 와삭와삭 씹히는 게 입안 가득 서늘함마저 주었다.

무역회사 샐러리맨에서 김치맨으로 전향한 장씨는 일요일마다 직접 밭에 나가 각종 야채를 재배한다."농부의 부지런함이 몸에 배야 정성이 담긴 김치를 담글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샐러리맨의 기질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일까. 그의 김치공장에는 '김치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한 중국.대만 관광객이 줄서고 있다.

청주=최민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