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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냉전적인, 너무나 냉전적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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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느 민족이나 역사적 전환기에는 극복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냉전체제의 유산 극복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냉전적 관행과 바깥 세상의 보편적 흐름(세계적 표준 또는 글로벌 스탠더드)사이에 격차가 벌어져 있고, 이 격차가 세계화 시대에 우리의 생존을 어렵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진보는 동전의 양면

최근 몇달간 한국의 정치.사회상황도 너무 냉전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좌우대결이라는 한마디로 규정해버리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세계적 표준과는 동떨어진 냉전적 보수와 냉전적 진보의 대결이고 그래서 문제가 있다.

우리 사회의 냉전적 보수와 냉전적 진보는 동전의 양면이다. 서로 대결하면서도 상대의 존재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다같이 서로 대결하는 구도, 즉 냉전구도의 존속을 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가 일치된다.

그래서 경제개혁뿐 아니라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동기는 다르지만 결과론적으로 다같이 현상변화를 반대한다. 그 와중에 진정으로 탈냉전을 원하는 말 없는 다수의 목소리는 매몰되고 있다.

경제 및 사회정책에 대해 냉전적 보수는 냉전시대의 박정희(朴正熙)모델에 대한 깊은 향수를 가지고 있다. 내놓고 표현은 하지 않아도 과거에 성공했던 이 모델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그래서 이른바 개혁을 싫어한다. 강한 재벌에 대한 대응세력으로서의 강한 노조를 옹호하는 냉전적 진보진영 역시, 실업을 야기하는 구조조정을 싫어한다.

그래서 냉전적 보수는 경제개혁 시도를 사회주의라고, 냉전적 진보는 신자유주의라고 공격한다. 이처럼 이들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암묵적으로 담합해 현상유지를 옹호한다. 정부의 개혁정책은 이같은 냉전적 좌우의 협공을 받아 흔들려 왔다.

그러나 냉전적 진보가 세계적 표준이나 세계화의 흐름 자체를 부정하는 대책 없는 이상론에 빠져 있다면 냉전적 보수는 박정희 모델에 기초한 한국적 자본주의가 세계적 표준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주의 동원경제 체제를 닮았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생산수단이 사유화됐다는 것만 빼곤 자원의 집중과 동원방식이 대단히 유사했다.

그 때문에 도덕적 해이와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후 외환위기의 극복과정은 사회주의 체제전환 연구의 권위자인 야노스 코르나이(Janos Kornai)가 지적한 이른바 연성예산제약(soft budget constraints) 문제의 해결 노력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남북관계 문제도 마찬가지다. 냉전적 진보가 "만경대 정신을 이어받아…" 라는 식의 비현실성을 드러냈다면, 냉전대결의 현상유지를 원하는 냉전적 보수는 이를 빌미로 결국 임동원 장관 해임건의안 가결, 그리고 DJP 공조파기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결과론적으로 남북한 문제를 놓고 냉전적 보수와 냉전적 진보간에 탈냉전화 작업에 반대하는 공조가 이뤄진 셈이다.

이같은 냉전적 좌우연합에 의해 경제나 남북관계에 있어 현상변화가 저지되고 다수의 건전한 중산층의 목소리는 매몰돼 버리는 상황은 왜 초래됐는가? 여기에는 정치개혁을 게을리한 현 정부도 책임이 있다.

***중산층 끌어안는 개혁을

강한 반대가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추구하겠다면 당연히 개혁지향적인 중산층의 정치권 진입을 촉진하기 위해 기존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정치개혁이 있어야 했다.

그 결과 지역적 기반이 약하고 돈이 없어도 개혁적 이념과 정책에 충실한 인사들이 정치권에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제도와 관행을 바꿔야 했다. 이같은 과감한 조치를 지난 총선 이전에 여당 스스로 앞장서 시도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 결과가 이제 부메랑이 돼 되돌아온 것이다.

경제개혁과 남북한 관계변화의 핵심은 세계사의 보편적 흐름에 걸맞은 새로운 탈냉전 모델로의 진입이다. 그런데 그것은 정치개혁을 통한 개혁 지지세력의 결집 없이는 대단히 힘들다. 우리는 언제쯤이나 냉전적 좌우대결구도를 넘어서서 제3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까□

尹永寬(서울대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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