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자사 책 '사재기' 극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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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최근 출판계 불황이 계속되면서 그동안 일부 출판사들을 중심으로 행해져온 '사재기' 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특히 여름철 대목을 맞아 사재기가 더욱 집중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소문이 출판계에 파다하다. 한 출판인의 용기있는 '양심선언' 을 계기로 독서시장의 왜곡을 초래하는 이 사재기 현상에 대해 짚어본다.

사재기란 출판사들이 자사가 출간한 책들을 서점에서 다시 구입,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오르도록 '조작' 함으로써 판매를 촉진시키는 출판업계의 오래된 관습. 서울 대형서점들의 베스트 셀러 목록은 언론이나 자체 광고망을 통해 소비자는 물론 전국의 다른 중소서점들의 책 구매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출판 관계자들은 "1997년 말에도 일부 출판사의 조직적인 사재기가 폭로돼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지만 이젠 아예 '공공연한 마케팅 전략의 일환' 이 된 느낌" 이라고 입을 모은다.

◇ 얼마나 심각한가〓지난 겨울 두 종의 책에 대해 사재기를 직접 지휘하며 많은 갈등을 겪었다는 S출판사의 전 영업담당자 K씨는 "출판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얘기하기도 부끄럽지만, 현재 대형서점 베스트 셀러 종합 순위 20위권의 책들 중 70~80%는 사재기와 관련있다고 확신한다" 고 말했다.

그는 "자금이 없어 아예 엄두도 못내는 출판사들을 제외하고는 사재기를 안해본 출판사가 오히려 적을 것" 이라면서, "특히 대상층이 넓으면서, 효과가 비교적 크고 오래가는 문학서적들이 주요 대상" 이라고 설명했다.

교보문고 홍보담당 남성호 대리도 "판매집계만으로 보면 종합순위 20위권에 든 책들 중에 사재기 증거가 역력해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제외하는 책이 절반 가량 된다" 고 밝혔다.

예를 들어 한번에 10여권 이상씩 대량판매됐다거나 특정시간이나 요일에 판매가 집중된 책 등은 출판사가 사재기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 서점 직원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소설을 과학서적 등 분야가 전혀 다른 코너에서 계산하는 수법을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남씨는 "그렇지만 경험이 많은 출판사들은 수법이 더욱 교묘해지고 있어 '감' 을 잡고도 적발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면서 "이 때문에 우리 서점 내부에서도 베스트 셀러 목록을 공개하는 문제에 대해 논란이 많다" 고 털어놓았다.

◇ 어떻게 이뤄지나〓K씨에 따르면 중소 출판사들의 경우 대학생이나 주부 아르바이트 직원을 통해 교보나 영풍 등 2~3곳의 대형서점에서 각각 한주에 50~70부 정도의 책을 구입한다.

그는 "사재기를 시작한 그 주에 즉시 5~10위권 진입도 가능했다" 면서 "그 결과를 보고 적당히 양을 늘려 판매 '안정권' 에 접어 들 때까지 한달 이상 사재기를 계속한다" 고 설명했다.

이렇게 한달간 사재기를 하는 비용은 인건비까지 포함해 약 3백만원. "한번에 6백만원 정도인 주요 일간지 5단통광고보다 돈도 절반 밖에 안드는 데다, 효과도 훨씬 직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출판사들로선 그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다" 는 것이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한기호 소장은 "베스트 셀러 서적만 주로 판매하는 킴스클럽류의 대형할인매장이 급격히 늘어난 데다, 인터넷 서점들도 초기화면에 띄우는 책들을 선정할 때 오프라인 대형서점의 베스트 셀러 목록을 많이 참조하기 때문에 절박한 심정으로 사재기를 시도하는 출판사들이 늘고 있다" 면서 "일방적으로 출판계를 매도하기도 힘들다" 고 말했다.

◇ 무엇이 문제인가〓많은 양서들이 독자들에게 소개될 기회조차 잃은 채 매장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문제다. '자력' 으로 어렵게 베스트 셀러 목록에 진입했다가도 사재기 책에 밀려 곧 탈락함으로써 시장에서 영영 사라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한소장은 또 "그렇지 않아도 본격문학이 침체되고 있다고 하는데, 사재기를 통해 예상 외로 뜬 작가들이 베스트 셀러 작가로 대접받음으로써 다른 작가들에게도 혼란을 주는 등 문학계에 미치는 악영향도 적지 않다" 고 지적했다.

그러나 사재기 뿌리뽑기는 전반적인 문화.사회풍토의 개혁 없이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K씨는 "대형서점 판매담당자들의 실적경쟁도 출판사들의 사재기를 '알고도 눈감아' 주거나 부추기는 큰 요인" 이라면서 "전체 매출의 2~3%에 불과한 만큼 일단 서점들의 사재기 근절 의지가 중요하다" 고 말했다. 베스트 셀러 목록도 정말 소비자 정보 차원에서 만들려면 보다 객관적이고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

또 한소장은 "무엇보다 소비자들이 베스트 셀러 목록이나 화제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책을 고르는 문화가 조성되야 한다" 고 강조했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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