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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 “미·중관계 어려워지면 나를 꼭 보내더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59호 35면

2주 전 방한한 헨리 키신저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 특강에서 미국과 중국에 대한 특유의 역사적 안목과 현실 감각을 곁들인 분석을 내놓았다. 그는 미국을 ‘망설이는 제국’ 내지는 ‘마지못해 하는 제국’으로 규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오래 망설이다 뒤늦게 참전해 승리한 후 국제연맹을 창설했지만 회원 가입도 하지 않은 게 대표적 케이스다. 미국의 이런 ‘고립주의’ 행태는 국제무대에서 반복돼 왔다. 제국은 남의 나라를 침략해 빼앗고 직접 통치하면서 자국 영토로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는 전통적 의미의 제국주의적 행태는 아니다

키신저 박사가 특히 주목한 것은 미 국민이 모든 전쟁을 ‘정해진 시간 내에 꼭 끝내고 빠져나와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4년, 제2차 세계대전은 5년, 한국전쟁은 3년, 월남전이 9년 정도였다. 모든 전쟁은 끝나는 즉시 극소수를 제외한 미군의 전면 철수로 종결됐다. 다시 말해 미국은 국제분쟁에 개입할 때는 하지만 분쟁이 종식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듯 손을 털고 빠져나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전도 마찬가지다. 이라크전은 계획 수립 당시부터 ‘전광석화’같이 치고 들어가 사담 후세인 정권만 무너뜨리고 빠진다는 전략 아래 수행됐다. 실제로 전쟁 목표는 순식간에 달성됐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일어나 미군을 환영할 것이라던 이라크의 국민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반군이 등장했고, 강력한 독재가 사라진 자리를 채우려는 부족, 종파 간 내전이 겉잡을 수 없이 번졌다. 미국은 마지못해 철군을 보류하며 반군소탕작전을 벌이지만 이 역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내년 6월 완전한 철군을 미 국민에게 약속한 대가로 수행되는 한시적 조치다. 최근의 아프가니스탄전 증파 결정도 처음부터 철군 날짜를 못 박은 채 이뤄졌다.

키신저 박사는 미 국민의 ‘조급함’이 제국다운 장기적 세계 전략을 펼칠 여지를 앗아간다고 진단했다. 이는 사실 미국뿐 아니라 서방 선진 민주국가들의 공통점이라고 했다. 세계전략이란 긴 안목에서 미래 안보를 생각해 국민이 지도자들을 믿고 희생할 수 있는 참을성이 있어야 하지만 미국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미국과는 정반대의 경향을 갖고 있다. 키신저는 중국이 긴 역사에서 오직 제국만 운영해 왔다는 점을 중시했다. 중국은 늘 ‘천하’의 중심이었다. 군사력이 약한 왕조 때도 중국은 문화의 힘으로 주변 ‘오랑캐’들을 제압했다. 중국 전래의 국제관계는 조공관계가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다른 나라를 동등한 국가로 인정하며 협상하고 동반자 관계나 동맹을 맺은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 그런 의미에서 동등한 주권을 갖는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는 현대 국제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경험과 지혜가 과연 얼마나 있을지 우려가 된다는 것이다.

근세에 들어와 외세 침략과 주권 유린을 뼈저리게 경험한 중국은 오늘날 유난히 주권과 호혜평등의 원칙을 존중할 것을 국제무대에서 역설한다. 사실 내정불간섭 원칙은 권위주의 정치 체제에 대한 국제적 비판을 막는 데 효과적이기에 중국이 특히 강조하고 있다. 이는 덩샤오핑이 설정한 중국 외교정책의 핵심인 ‘도광양회’, 즉 실력을 기를 때까지 몸을 낮춘다는 정책과도 맥이 닿고 있다. 아직 중국이 경제발전과 내치에 전력투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섣불리 국제무대에 개입하지 말라는 이 충고는 아직도 중국 대외정책의 근간이다.

문제는 이제 중국이 어느덧 세계 최강대국의 하나가 돼버렸다는 사실이다. 좋든 싫든 중국은 주요 2개국(G2)의 일원으로 미국과 ‘세계경영’을 해야 할 위치에 왔다. 그렇다면 중국은 앞으로도 몸을 낮추고 실력을 기르는 데만 힘을 쏟을 것인가, 아니면 국제문제에 점차 제 목소리를 낼 것인가. 미국과 중국 ‘제국’에 이런 분석을 내놓은 키신저 박사는 이틀 후 베이징으로 떠났다. 공항으로 가는 차에서 그는 “미·중 관계가 좀 어려워지면 나를 꼭 보낸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미국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이다. 중국은 가장 중요한 교역국이다. 미국은 한국 안보를 보장하고 중국은 북한 체제를 지탱해준다. 그런데 미국은 경제환란과 국내 문제, 이라크·아프간전으로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반면 중국은 실력을 기른 후 점차 강한 톤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망설이는 제국’과 ‘떠오른 중국’ 사이에 낀 한국으로서는 이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삼을 지혜가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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