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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2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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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그때에 아버지가 뭐라고 말했다. 그 순간의 얘기는 어머니가 몇 번이나 말해서 나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뭐 이랬다던가.

-우리는 정치를 모르는 양민입니다.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랬더니 마술처럼 그들은 뭔가 일장 연설을 하고는 모두들 다시 들어가라고 하더니 부근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사라졌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노관 속에 쭈그리고 있었다. 우리 외에도 아이들이 몇 명 더 있었지만 신기하게 아무도 울거나 보채지 않았다. 어머니의 회상에 의하면 그들은 국방군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인민군 정찰대가 틀림없을 거라고 했다. 어째서냐면 장군을 지지한다던 그 사람이 아침에 보니 농가에서 밥을 얻어먹고 있더라고 했다. 그래도 아직은 개전 초기여서 남과 북의 살기등등한 병사들은 양민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전선은 벌써 훨씬 남쪽으로 이동해 가버렸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시흥천이 가로지르고 수원으로 구부러지는 철로가 보이는 구로동 초입의 다리목에서 나는 사람이 죽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우리 식구와 몇몇 무리가 작은 봇짐이나 륙색을 지고 다리를 향해 걷는데 어머니 옆에서 따라가던 내 손목을 누군가가 슬그머니 쥐었다. 올려다보니 무명 핫바지를 입은 아저씨였다. 나는 얼마쯤 걷다가 어머니의 도움으로 그 아저씨에게서 떨어질 수가 있었다.

-아이, 옷이 이게 뭐니?

하면서 어머니가 내 바지를 치켜주는 시늉을 하며 뒤처졌다. 바로 앞에 인민군들이 초소를 세우고 인천 방향에서 오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그들의 누런 군복과 붉고 넓적한 견장이며 총열에 구멍이 여러 개 뚫린 총은 아이들이 나중에 가르쳐준 대로 따발총이었다. 우리는 열을 지어 차례로 지나가는데 뭔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고 아주 짧은 순간에 웬 사람이 뚝 아래 논을 향하여 달려 내려갔다. 모두들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내 손목을 잡았던 그 아저씨였다. 그는 벼가 푸르게 자라난 논으로 첨벙거리며 뛰어들었고 둑 위에 나란히 선 군인 두 사람이 총을 연발로 쏘았다. 그 사람은 그대로 논에 엎어져서 일어나지 않았다. 나중에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군인들이 그 아저씨에게 바지를 내려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마 속옷이 국방색이었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다리를 건너서 차츰 공장지대로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폭격이 휩쓸고 지나간 처참한 건물들을 보게 된다. 머리카락처럼 헝클어진 철근이며 시멘트의 무더기와 총알 구멍이 선명한 벽과 부서진 유리창들 그리고 아직도 연기를 내며 타오르고 있는 무너져내린 지붕, 그리고 길가에는 부서져 타버린 트럭도 있었고 포신이 휘어진 채 옆으로 기우뚱하게 넘어진 탱크도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옷도 없고 검게 그을린 사람의 형체만 남은 시체 하나가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에도 비슷한 모양의 물체가 하나 더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젖혀서 돌아다보기까지 했다. 어머니가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내 등을 떠밀면서 '앞만 봐라, 어서 누나들 뒤를 따라가' 라고 했지만 나는 다시 돌아보곤 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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