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항원사 도피 3년 어떻게 지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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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노항 원사는 도피 중 여장(女裝)을 해 추적을 피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실제로 그가 머무른 아파트에선 2백45㎜짜리 남자구두 네켤레와 같은 사이즈의 여자구두 세켤레, 여성용 스카프.반바지 두장, 클렌징크림 같은 화장품이 발견됐다.

수사팀은 그러나 이들 물건이 도피를 도운 내연녀 등의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朴원사는 1982년 이혼해 혼자 살아 왔다.

그의 수첩엔 '3월 9일 본인 실수로 자동차 뒷범퍼 받음' 이라는 글이 적혀 차를 몰고 외출했음을 보여주었다.

또 아파트에서 영어.일어.중국어 교재 및 테이프와 학습 흔적이 발견돼 해외 도피를 구상했다는 추측도 불러 일으킨다.

그의 도피생활 3년 중 이 아파트에서 은거(지난해 봄 이후)에 들어가기 전의 행적은 베일에 싸여 있다.

합동수사반은 "가족의 도움을 받아 피신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 밝혔다.

◇ 추적 따돌린 잠행=그동안 수사팀은 서울 망원동 朴원사 집과 연고지에 잠복을 계속했다.

그가 불교 신자인 점을 감안, 서울.경기.충남지역 암자들도 집중 수색했다. 충남 논산 등 친인척이 사는 집 10여곳을 동시에 급습하기도 했다.

현상금은 2천만원까지 올랐고 전국에 50만장 이상의 수배 전단이 뿌려졌다.

가족.지인 등 20여명에 대해 자금 추적과 전화 감청도 했지만 허사였다. 99년엔 그의 홍콩 도피설이 나와 인터폴을 통해 수사협조를 요청한 적도 있다.

그런 추적망을 피해가며 그는 한때 경기도 안산의 한 주택에 머물렀고, 야산 노숙이나 여관 생활도 한 것으로 알려진다.

◇ 경비원도 몰랐던 은둔=朴원사가 붙잡힌 32평짜리 아파트는 그의 철저한 은둔생활을 보여준다.

한 수사관은 "그의 누나가 지난해 1월 '김순덕' 이란 가명으로 이 아파트를 전세 계약했다" 고 밝혔다. 그러나 동사무소에 전입신고는 돼있지 않은 상태다. 朴씨의 이삿짐이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도 없다고 한다.

지난해 8월 옆집에 이사온 朴모(70)씨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아 빈 집인 줄 알았다" 고 말했다. 아파트 경비원 李모(58)씨조차 "밤에도 불이 꺼져 있어 사람이 안사는 줄 알았다" 고 했다.

관리사무소의 한 직원은 50대 아주머니(朴원사의 누나 추정)가 한달에 한두번 왔다가곤 해 "왜 이사오지 않느냐" 고 물었더니 "집안에 환자가 있어 수발하느라 이사를 못한다" 고 둘러댔다고 전했다.

◇ 쌓아둔 식량.약품=냉장고는 김치.장조림 등 밑반찬과 고기.계란 등으로 꽉 차있었고, 거실장에는 감기약.빈혈약.비타민 등 비상약품도 상당량 갖춰져 있었다. 朴원사의 누나가 가져다 준 것으로 수사팀은 파악한다.

출입문 옆 작은방에는 일간신문 등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뉴스를 꼼꼼히 챙겨왔음을 알 수 있었다.

창문은 커튼과 신문지로 가렸고, 안방에는 TV 불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두터운 차광 커튼을 쳤다. 아파트 현관 옆 창고에는 빈 초코파이.라면 박스, 계란판.음료수병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

손민호.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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