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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하경덕의 『사회법칙』 80주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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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올해는 6·25 60주년과 경술국치 100주년 등 범국민적 행사가 줄을 잇는 해다. 지난 100년, 역사의 고비마다 우리 민족이 함께 겪은 공동경험의 의의를 재정리하며 무엇이 그 경험의 연속성을 보전했고, 무엇이 단절을 의미했는가를 되짚어보는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겠다. 민족사회의 집단적 경험 속에서 개인이, 특히 한 시대의 지성인들의 업적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또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는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학문적 과제다. 그러나 3·1운동으로부터 10년, 일제의 식민통치가 날로 극악해지던 시점에 구미학계의 주목과 찬사를 받은 한국 학자의 사회이론서가 미국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지금의 시점에서라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 태어나 전주 신흥학교와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하버드대학에 유학한 후 돌아온 하경덕의 활동경력은 그 시대에 많지 않던 구미 유학생들이 걸어온 역정을 대표하고 있다. 그는 YMCA와 흥사단에서의 활동과 더불어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교수로 일제 말기까지 청년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세계문화의 주류에서 소외됐던 우리 사회에 국제적 추세와 근대사조의 흐름을 알리는 촛불의 역할을 수행했다. 참혹했던 민족의 수난기에 구미유학을 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특전임에 틀림없지만 반면 동포들에 대한 책임의식도 그만큼 컸을 것이다. 더구나 국내외에서 일제와 맞부딪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국민계몽활동에 주력했던 그들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는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하경덕을 비롯한 일군(一群)의 구미유학생들이 일제 패망과 민족 광복에 대비한 한국 사회의 집단적 능력을 키우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해방 직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르는 비상 시국에서 그들이 과시한 저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특히 그를 포함한 구미유학생 출신의 인사들이 해방정국의 혼미 속에서 미군정의 과도체제를 대한민국 수립으로 연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경덕은 서울신문·코리아타임스·합동통신 사장과 축구협회장·국제문화협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문화·언론 분야에서 새 나라의 초석을 놓는 데도 크게 공헌했다.

한국 학계의 인문·사회 분야에서 선각자로 불릴 수 있는 하경덕의 『사회법칙』의 주제와 학문적 가치는 과연 어떤 것인가. 그에 따르면 모든 사회현상과 변화과정을 체계적이며 포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일반원칙을 찾는 것은 고래로 모든 인문·사회학자들의 꿈이었다. 그 결과로 선험적·목적론적·통계적·인과론적, 그리고 변증법적 전제와 이론을 토대로 제시된 136편의 이른바 사회법칙들을 면밀히 분석한 하경덕은 자연과학적 기준을 충족시킬 만한 일반법칙은 전무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책의 서문을 쓴 고든 캐봇 교수는 하 박사가 헤겔과 마르크스를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제시한 사회법칙들의 방법론적 오류와 한계를 지적하고 사회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평가했다.

모든 사회현상은 인간의 가치와 직결돼 있으므로 이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학문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과학일 수 없으며 오히려 의학과 같이 예술이나 인술로 이해되고 social arts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경덕은 주장했다. 그러기에 인간의 권리와 가치를 존중하고 그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는 데 무관심한 사회학은 불필요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른바 선진사회는 후진지역을 점유할 수 있다는 제국주의적 발상이나 약육강식의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무솔리니와 같은 독재자들의 궤변이 비판의 대상이 된 것도 물론이다. 이렇듯 민족사의 암울했던 시기에 세계학계의 중심무대에서 우리의 지적 성실성을 과시한 하경덕 선생의 노력은 오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