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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금융전문가 키워야 글로벌 리딩 은행 나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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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은행산업의 상여금(보너스) 문제만 해도 그렇다. 30여 년 전 냉전체제 당시 미국과 옛 소련이 달 착륙 경쟁을 벌였을 때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수학자 및 과학자들의 연봉이 가장 높았다. 그 이후 80년대 초반 월가에서 금융공학이 태동하게 되어 고급 두뇌 수요가 커졌고, 이때 마침 NASA의 인력 수요는 줄어들었다. 월가의 은행들은 보다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이들을 흡수했다.

또 수학자와 과학자들이 제대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정보기술(IT) 부문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정보 비대칭의 해결과 리스크 관리가 목적인 금융공학은 이후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면서 실물경제에 고부가가치를 제공하고 전 세계의 생산성 향상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만약 고급 두뇌에 대한 보상이 줄어들면 어떻게 될까. 이미 막대하게 투자돼 있는 금융 부문의 IT 시스템이 쓸모없어지고 금융 전문인력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보너스를 줄이라는 압박에 구미 은행들이 고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여러 부문에서 글로벌 챔피언이 나왔다. 경제 규모도 몰라보게 커졌다. 이제 국내 은행산업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글로벌 리딩 뱅크를 탄생시켜 한국 기업들과 동반성장을 할지, 아니면 국내 시장에 자족하는 것이 옳은지를 선택해야 한다. 한국의 1, 2위 은행을 합친다고 해도 세계 50위가 되지 않는다. 은행의 규모는 매우 중요하다. 우선 규모의 경제, 즉 막대한 IT 및 전문인력에 대한 투자효율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 또 글로벌 자본시장 유통 네트워크를 구축해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한국 기업에 대해 고부가가치의 금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자본 중개, 유가증권 인수 및 기업금융 자문업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문인력과 금융 IT 시스템에 대한 투자나 국제 자본시장의 네트워크 구축은 글로벌 수준의 자산 규모를 가져야 비로소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금융 전문인력은 불과 몇 년 만에 양성되는 것이 아니다. 전문화를 가로막는 은행의 순환근무제도부터 손질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다 우리나라 은행들은 CEO 교체가 너무 잦다. 경영실적에 관계없이 물러나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관행은 경영의 일관성을 무너뜨리고, 막대한 기회비용의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선진국 리딩 뱅크들의 수장들은 하나같이 10년 이상 CEO를 맡고 있다. JP모건체이스은행은 여러 차례의 대등 합병을 통해 세계 최대 은행으로 발돋움했지만 그 과정에서 존 맥길리커디 회장은 16년간 CEO를 맡았다. 그 후 바통을 이어받은 빌 해리슨 회장도 10년 가까이 CEO로 장수했고, 그는 재직 기간 중 후임자로 제이미 다이먼 회장을 발굴해 CEO직을 물려주었다. 이런 안정적인 지배구조와 경영권 승계는 산탄데르은행, HSBC은행 등 다른 일류 은행들도 마찬가지다.

세계 일류 은행 간판 CEO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초급 행원에서 출발해 내부 승진으로 CEO까지 올라왔다는 것이다. 수십 년간 풍부한 경험을 쌓고 두터운 내·외부 인맥을 자랑한다. 경륜이 충분히 검증된 만큼 완전책임(full empowerment) 경영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은행 내부의 존경과 충성을 바탕으로 능력 있는 CEO가 소신껏 책임경영을 할 때에 성공은 비켜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김수룡 도이치은행그룹 한국회장 겸 한국대표  미 공군협회 미그앨리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