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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아직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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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확히 10년 전인 1994년 10월 21일. 온 국민을 충격과 혼란 속에 빠뜨렸던 성수대교 참사가 일어났다. 구멍이 뻥 뚫린채 흉물처럼 서 있는 다리는 재난의 서곡이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서해 페리호 침몰, 괌 KAL기 추락, 대구지하철 참사 …. 대형 사건이 줄을 이었다.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있지만, 생존자와 유가족에게 고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성수대교 사고로 딸을 잃은 황인옥씨. 환경미화원인 그는 10년을 술과 친구삼아 보냈다. 만취상태로 동호대교 기차길에 올라 국화꽃도 뿌렸다. 아버지는 아직도 딸이 그립다. 꿈에도 한번 나타나지 않는 무심한 딸이 그저 보고 싶을 뿐이다.

MBC 스페셜은 24일 이렇게 지금도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재난 당사자들을 밀착 취재한 다큐멘터리 '참사 그후, 잃어버린 시간들'을 방송한다. 성수대교 참사 10주기를 추모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제작진은 방송에서 사건 당사자들이 현재도 많은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보고한다. 대구 지하철 참사의 생존자 이영희씨는 늘 불안한 마음 때문에 잘 되던 식당 문을 닫았다. 지금도 어딜 가나 비상구부터 찾고 지하 주차장은 들어가지 못한다. 마지막 칸의 유일한 생존자 김정훈씨(가명)도 사고 후 공부를 할 수 없는 증세에 시달렸다. 머릿속이 탁해지면서 기억력이 점점 떨어져 아무 일도 못하고 거의 집에만 있었다.

대형 참사가 일어나면 지금껏 현장복구와 외상치료, 보상으로 마무리짓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정신적 고통은 종결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부른다. 미국에선 80년대 초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해 9.11 테러 후 적극적인 치료를 병행했다.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제작진이 만났던 20여명의 생존자들은 한결같이 수면장애, 대인기피, 폐쇄된 공간에 대한 두려움, 기억력 감퇴 등을 호소했다고 한다. 서울대 신경정신과 류인균 박사는 재난 사고의 정신적 충격이 실제 뇌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가설 아래 연구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제작진은 "모든 일이 끝났다고 여겨질 때 새 고통이 시작된다"며 "사고 후유증을 방치할 경우 또다른 피해를 낳기 때문에 정부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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