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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며…] 지나온 한 해가 선한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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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한 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 영하의 추위 속,바람까지 맵싸하다. 여기저기 몰아치는 구조조정 회오리에 오가리든 가슴으로는, 나뭇가지 끝에 간신히 달려 팔락거리는 마른 나뭇잎도 안쓰럽다.겨울은 아직 중턱에도 미치지 않았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서울 도심의 원심력에 휘둘리듯, 쓸쓸한 교외선을 타고 송추역에 내렸다.울대리 옥수뜰의 원각사 입구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사패산을 오른다.

등산화 밑에서 털걱털걱,하는 소리가 내 온몸을 울린다. 텅 비어 껍데기만 남은 듯한 내 몸은 금방 금이 갈 것 같다. 흙길 가운데 옹당이마다 얼음이 하얗다. 냅다 밟아 본다. 파삭, 그렇게 나도 바스러지고 싶다.

물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터 잡고 유흥객을 부르는 근교의 계곡이지만 여기는 가게 하나 없다.여느 때면 한적함과 깨끗함이 운치를 더하겠지만 이 추운 겨울엔 그마저 인적 없음이 아쉽다.깍깍, 까마귀 한 마리가 울며 정면으로 올려다보이는 커다란 바윗덩이, 사패산 봉우리를 향해 홀로 날갯짓을 한다.

조그만 절, 원각사 오른쪽으로 산길이 굽어 오른다. 7∼8미터 높이의 폭포가 나타난다.가장자리가 얼어 고드름 장식이 대롱대롱한다.폭포 위에 얹혀 있는 큰 바위는 뒤로 쉽게 올라설 수 있다.마당 같은 바윗등에 덜퍽 주저앉았다.

발아래 걸어 오른 계곡 길이 훤히 보이는 것처럼 지나온 한 해가 눈에 선한데,이렇다 할 내 발자국은 없다.폭포 밑의 얼음장에 어룽더룽 비치는 물무늬처럼, 차가운 가슴팍에 마음의 무늬가 어지럽다.

내내 심란하기만 하여 아예 신경을 끄고 한 걸음 두 걸음 걷는 데만 집중한다. 가파르지 않은, 조붓한 산길이지만 등판에서 금세 땀 기운이 느껴진다. 들머리에서 1시간 30분쯤, 그리 오래 걷지 않아 사패산 정상의 운동장만한 너럭바위에 섰다.

시야가 확 트인다.남쪽으로 도봉산의 포대능선 ·자운봉 ·주봉 ·오봉이 울쑥불쑥 연봉을 이루고 잇따라 인수봉·백운대·만경대의 삼각산(북한산)까지 펼쳐진다.

한눈에 들어오는 저 장쾌한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리는 한북정맥이다. 금강산 위의 백봉에서 가지를 친 한북정맥은 백암산 ·오성산 ·대성산 ·백운산·운악산을 거쳐 지금 내 발밑을 지나 도봉과 북한산으로 달려가고 있다.

사패산은 552미터로 높이가 낮고 도봉산의 뒤에 묻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묵묵히 한북정맥의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이 추운 겨울 역시 따뜻한 봄으로 가는 길목이듯, 지난 한 해 허전했던 내 발길도 언젠가 높다란 삶의 봉우리로 이어질 것임을 믿는다.

배두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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