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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 뉴스 <76> 중국판 ‘인디아나 존스’ 조조묘 발굴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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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지난해 12월 27일 허난성 문물국은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양현 안펑(安豊)향 시가오쉐(西高穴)촌 일대에서 발굴한 동한(東漢)시대의 무덤이 조조의 묘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도 지난 1월 14일 조조 무덤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고고학 포럼을 열고 “이 무덤의 주인이 위(魏) 무왕(武王) 조조의 고릉(高陵)”이라고 최종 발표했다. 국가문물국도 지난달 28일 “진짜 조조 무덤”이라고 공식 인정했다. 권위 있는 기관들이 총동원된 모양새다. 왜 정부기관들이 모두 나서 조조 무덤 공인에 열을 올릴까. 그동안 조조 묘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1998년 발견된 비석으로 묘 위치 좁혀져

1998년 4월 시가오쉐촌 주민 쉬위차오(徐玉超)는 공터를 개간하다 옛 비석을 발견했다. 조조 묘 발굴의 시작이다. 신고를 받은 안양시 문화재 관리국은 탁본을 떠 정밀 해독에 착수했다. 해석 결과 이 비석은 조조 사후 불과 100여 년 뒤인 후조(後趙, 319~351)의 부마도위(駙馬都尉, 황제의 사위)였던 노잠(魯潜)의 것으로 밝혀졌다. 비석에는 위무제릉(魏武帝陵)이 묘 서북쪽 43보(步) 떨어진 곳에 있다고 적혀 있었다.

노잠 묘 발견으로 조조 묘의 위치 범위가 좁혀졌다. 현재 조조 묘 발굴팀장인 판웨이빈(潘偉斌·41) 허난성 고고연구소 부연구원은 2003년부터 조조 묘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2004년 삼국시대 황제릉들의 소재지를 고증한 책 『위진남북조수제릉(魏晋南北朝隋帝陵)』을 펴냈다. 고릉이 안펑향 시가오쉐 인근에 있을 것이라고 처음 밝힌 것도 이 책이다. 당시 실지 조사와 고고학적 검증을 통해 판웨이빈은 조조의 장지가 허난성 안양현 시가오쉐촌 북부 1000㎡ 일대일 것으로 결론 내렸다. 판웨이빈은 이 일대 평지를 조조릉원구로 명명했다. 위나라의 수도였던 업성(鄴城) 유적지에서 30리(14.5㎞) 떨어진 곳이다. 동시에 허난성 안양현 펑뤄(豊羅)진 서문표(西門豹, 전국시대 업성의 수령으로 척박했던 땅을 옥토로 바꿨다는 인물) 사당의 서쪽 언덕 부근이다. 이는 조조의 유언인 ‘종령(終令)’의 “업의 서쪽 언덕 위, 서문표 사당 가까운 곳에 묻으라”와 맞아떨어진다.

‘왕후급 대형 무덤’ 2006년 도굴꾼이 파헤쳐

조조

2005년 같은 마을에서 주민들이 주업인 벽돌을 만들기 위해 마을 서남쪽에서 흙을 채취하다 깊이 5m 정도 되는 지점에서 주위와 확연히 다른 토질층을 발견했다. 마치 묘지의 다진 흙과 같았다. 허난은 예로부터 문물 출토가 많은 곳이다.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는 도굴꾼들이 우글거린다. 이때 발견된 묘지터는 도굴꾼들을 소리 소문 없이 불러들였다. 1년쯤 지난 2006년 어느 날 고분이 도굴당했다는 신고가 안펑향 자전린(賈振林) 당서기에게 알려졌다. 고고학자 판웨이빈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이 묘지는 판이 저서에서 조조의 묘 소재지로 추정한 곳에서 멀지 않았다. 현장에 도착한 판웨이빈은 최근 도굴꾼들이 파헤친 묘혈을 발견했다. 그는 마을 촌장의 도움을 받아 몸에 밧줄을 묶고 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갖고 간 사진기로 묘혈 내부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현장을 떠났다. 연구실에 돌아온 판웨이빈은 사진에 찍힌 벽돌과 묘석의 크기, 묘실의 높이 등에 비추어 볼 때 이 고분이 동한(東漢) 말기 왕후급의 대형 묘지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아직 조조의 묘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향정부는 도굴꾼이 판 굴을 다시 메웠다.

2008년 초 베이징에서 중국 중앙방송(CC-TV)의 ‘탐색과 발견’ 제작진이 ‘조조 묘를 찾아서’ 촬영을 위해 안양시 고고학자들을 찾아왔다. 제작팀은 노잠 묘 비문에 적힌 대로 무덤을 기준으로 조조 묘의 존재 가능성이 높은 곳에 대한 측량을 진행했다. 이때 고고발굴팀이 조조 묘로 추정한 곳은 노잠 묘 출토지에서 서북쪽으로 500m 떨어진 언덕이었다. 당시 이곳에서 대형 기와와 궁전의 문에 사용되던 못들이 대거 출토됐다. 이때까지도 판웨이빈은 이곳이 조조 묘나 순장묘 중 하나 정도로만 여겼다.

중국 정부가 발굴 망설이는 사이 또 대규모 도굴

같은 해 9월 판웨이빈은 다시 안양현 파출소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경찰은 그에게 시가오쉐촌의 한 고분에서 도굴범을 잡았으며 출토품 여러 점을 압수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압수한 화상석(畵像石)에 대한 감정을 내려야 도굴범의 형량을 정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확인해 보니 이 무덤은 바로 판웨이빈이 2006년 밧줄을 묶고 들어갔던 곳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판웨이빈은 돌 위에 그려진 인물의 복식, 마차, 말, 직위 명칭 등을 감별한 결과 이 묘지가 동한 말기의 것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고분 발굴에 관한 정부의 심의 비준 절차가 미흡해 다시 굴을 메울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마을 공안(경찰)은 또다시 도굴 흔적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다이너마이트까지 동원한 대규모 도굴이었다. 묘실의 벽면이 처참하게 파손됐다. 이번에도 발굴하지 않는다면 도굴꾼들에게 이 묘를 완전히 도둑맞겠다는 생각에 판웨이빈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난성 문물국과 국가문물국의 허가를 얻어냈다. 안양 현정부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2008년 12월 12일 정식 발굴이 시작됐다.

2009년 출토된 ‘위 무왕’ 표식으로 조조묘 확신

중국 허난성 안양현에서 발견된 조조 묘 내부. 전실에서 조조 묘 발굴팀 대원들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중앙포토]

판웨이빈은 2009년 11월에서야 조조 묘가 맞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위 무왕이 항상 사용하던(魏武王常用)’이란 글이 적힌 표식이 계속 출토된 것이 결정적 증거였다.

교본에 따라 발굴단은 우선 쌓인 흙들을 정리하고 묘지 범위를 확정했다. 항공 촬영과 묘지 전체의 사진 촬영으로 원시 증거를 남겨 놓은 뒤 본격적인 발굴을 진행했다. 발굴 현장 일대에는 길이 60m, 넓이 27m의 남색 철제 구조물을 세워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묘지는 1호분과 2호분으로 나뉜다. 묘는 평면이 갑(甲)자 형태로, 동향이다. 묘도(墓道), 전실, 후실, 4개의 측실로 구성돼 있다. 비탈진 묘도는 길이 39.5m, 너비 9.8m, 가장 깊은 곳은 지표면에서 15m 아래에 위치한다. 큰 묘지의 면적은 740㎡다. 1호 묘실은 아직 발굴 작업이 계속 진행 중이며, 2호 묘는 이미 조조 묘로 확인됐다. 2호 묘에서 발굴단은 3구의 유해를 발견했다. 한 구는 남성, 두 구는 여성이다. 왕밍후이(王明輝) 유해 감정 전문가에 따르면 남성 유해의 사망 연령은 60세 전후로 66세에 사망한 조조와 비슷하다. 류칭주(劉慶柱) 사회과학원 학부위원은 50세 정도의 여성 시신은 조조의 부인 변(卞)황후로 추정되며, 또 다른 20세 전후의 여성 시신은 누구인지 확인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일부선 “조조의 72개 가짜 무덤 중 하나” 주장도

이곳에서 출토된 문물은 200개가 넘는다. 금은·다기 외에 59개의 수장품에 글자가 새겨진 석패(石牌)가 발견됐다. 그중 끝이 뾰족하고 아래가 네모난 석패에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魏武王常所用格虎大戟)’ ‘위무왕상소용격호대도(魏武王常所用格虎大刀)’라는 글자가 분명히 새겨져 있다. 문헌에 따르면 조조는 생전에 ‘위공(魏公)’에 봉해졌고, 후에 ‘위왕(魏王)’의 작위를 받았으며, 사후에 ‘무왕(武王)’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황제를 칭한 후에 ‘무황제(武皇帝)’라 추존됐다. 역사서는 ‘위무제(魏武帝)’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번 발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이 묘지가 조조의 ‘72개 의총(疑塚, 가짜 무덤)’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류칭주는 ‘72의총’설에 대해 “조조의 의총은 후세 사람들이 상상해 낸 것이다. 조조는 유명한 간신이었다. 사람들이 그의 묘를 도굴할 것을 염려했다는 주장 역시 연역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진짜다” 9가지 증거 vs “수상하다” 3가지 의문

한편 “조조 묘는 가짜”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런민(人民)대 국학원 위안지시(袁濟喜) 부원장은 “1호 묘 발굴이 3분의 1도 안 된 상태에서 2호 묘 주인이 조조라고 단정짓는 것은 너무 성급했다”며 “부장품들이 도굴범에게서 빼앗은 것인지, 묘에서 발굴한 것인지 확인이 안 된다”며 부정론에 가세했다. 출토품의 가치가 뛰어나지 않은 조조 무덤은 만일 주인이 조조가 아니라면 내세울 만한 가치가 거의 없다. 북경 청년보도 지난해 말 “조조 묘의 매년 입장료 수입이 최소 4억2000만 위안(약 719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며 “경제적 이익에 대한 고려가 학술적 양심을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고 보도했다. 다음은 홍콩 문회보가 최근 보도한 조조 묘를 둘러싼 9대 증거와 3대 의문이다. 판단은 독자 여러분께 맡긴다.

[증거1]

이 묘장(墓葬)은 묘실이 여러 개이며 벽돌로 방을 만든 대묘(多墓室塼室大墓)다. 주묘실은 사각의 뾰족한

천장으로, 뤄양(洛陽)에서 발견된 위나라 정시(正始) 8년 대묘의 천장 모양과 같다.

[증거2]

이 묘장은 같은 시기 묘장과 비교해 규모가 큰 왕후(王侯)급 묘장이다. 조조의 신분과 들어맞는다.

[증거3]

묘지의 지표면이 조조의 ‘종령(終令)’과 부합한다. 이 묘의 위치는 3㎞ 밖의 북조(北朝) 묘지보다 해발 10m가량

높다. 이는 ‘높은 곳이어서 터로 잡았다(因高爲基)’는 조건에 부합한다. 이번에 발굴된 묘실 위에는 봉분도 없고, 비석을

세웠다는 흔적도 없다. 이것도 ‘종령’의 “봉분을 세우지 말고 나무도 심지 말라(不封不樹)”는 내용과 부합한다.

[증거4]

문헌자료에 기재된 고릉의 위치와 부합한다.

[증거5]

칭호가 부합한다.

[증거6]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명패(銘牌) 중에 ‘위무왕(魏武王)’이라고 새겨진 것이 모두 7개다. 이는 신분 인정의 직접적인 증거다.

[증거7]

출토된 문물들이 조조가 유언한 ‘소박한 장례(薄葬)’에 부합한다.

[증거8]

묘장에서 발견된 남성 유골이 60세가량으로 조조가 사망할 때의 나이와 부합한다.

[증거9]

노잠의 묘지와 같이 부근에서 출토된 문물이 방증한다.

[의문1]

조조 고릉에서는 한말 묘지들에서 쉽게 발견되는 묘지(墓誌) 바닥 벽돌이 없다.

[의문2]

발견된 두개골은 60세 전후의 것인데 조조는 66세에 죽었다. 이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

[의문3]

사료에는 조조 묘에 처자를 합장했다고 전한다. 부인(변황후)의 사망 연령은 70세인데 발견된 두 구의 시신은 50대와 20대 여성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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