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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테이크(길게 찍기) 뒤에 숨쉬는 관능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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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대한민국에서 테오 앙겔로풀로스(사진) 감독을 만난다는 것은 이탈리아의 난니 모레티, 프랑스의 자크 리베트 같은 유럽의 거장을 만나는 고단한 여정과 한치의 차이도 없다.

대다수의 한국 관객은 1996년 앙겔로풀로스의 말년 작품, 그것도 '안개 속의 풍경'을 보는 것으로 앙겔로풀로스란 감독의 '봉인된 인장'을 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97년 '율리시즈의 시선'이 나타났다.

이것으로 그에 대한 판정은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앙겔로풀로스는 어렵고 지루하다"라고. 그것은 이상하게도 앙겔로풀로스와 비슷하게 '길게 찍기'(한 장면을 편집 없이 몇 분 이상 보여주는 것)로 자신의 영화세계를 완성했던 러시아 감독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평가와 유사한 구석이 있었다. 그 모진 시간을 뚫고 2004년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름으로만 떠돌던 거장을 직접 만나게 됐다.

'율리시즈의 시선'에는 "신이 만든 첫 작품은 빛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에 걸맞게 앙겔로풀로스의 거의 모든 작품에는 여행, 혹은 유랑이라는 테마가 등장한다. 이때 방랑하는 주인공보다 중요한 게 있다. 바로 그리스라는 공간이다.

'안개 속의 풍경'에서 안개로 가득 차 앞날을 예측할 수 없던 곳, '비키퍼'에서 양봉업자 마스트로얀니가 떠돌아다니는 낡은 집과 극장들이 유령처럼 버티고 서 있는 시골길, 그리고 '유랑 극단'에서 39년 메타삭스 장군이 실각하고 52년 파파고스 대통령이 선출되기까지 유랑극단이 순례했던 그리스 전역의 과거와 현재, 그게 앙겔로풀로스의 진정한 주인공일 것이다.

감독은 그곳에서 그리스의 피 묻은 독재와 탄압의 역사를 통렬하고도 장중한 방식으로 들춰낸다. 그것은 민중들의 강렬한 저항 의지와 좌파.우파로 쪼개어진 그리스의 어두운 현대사를 되살리는 일이기도 했다. 검열과 독재와 싸웠던 앙겔로풀로스의 손에 의해 비로소 그리스는 신들의 땅이란 오래된 신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앙겔로풀로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길게 찍기'를 고집한다. 가만히 보면 그는 현대 영화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이나 시간까지도 자르지 않고 한 장면 안에 그대로 담아낸다. 이러한 여분의 시간과 공간을 앙겔로풀로스는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 사이의 사멸한 공간"으로 정의해 왔다. 감독은 그런 사멸한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만 인간의 숨겨진 이면을 들추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번 회고전은 "앙겔로풀로스는 그저 지루할 뿐"이라고 생각해온 관객들에게 감독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귀한 기회가 될 것 같다. '사냥꾼들''비키퍼''범죄의 재구성' 같은 초기작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벌통 속에서 윙윙거리는 벌들의 소리로 인간의 들끓는 욕망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에서 유장한 리듬 감각뿐 아니라 폭발적인 관능성과 몽환적인 아름다움마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심영섭(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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