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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강요 …‘자발성’ 위장하려 골수 친일파들 면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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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창씨개명 강요 …‘자발성’ 위장하려 골수 친일파들 면제

전선에 동원되기 전에 찍은 군복 차림 김종계의 가족사진. 이른 바 ‘응소’를 기념해 찍은 사진의 왼쪽 깃발에 보이듯이, 가나자와(金澤)로 창씨해 조상 전래의성을 지키려 했다(『강제동원기증자료집』,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 2006). 징병과 창씨개명은 전쟁동원을 위한 황민화 정책의 쌍두마차였다.

대륙 침략이 본격화된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는 군수용 물자만이 아닌 식민지 사람들까지 전쟁터로 끌어가려 했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內地)과 조선은 한 몸이 되어야 했다. 조선은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닌 일본 국내였으며, 호칭도 조선인에서 ‘반도 동포’로 바뀌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제는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동화정책인 황민화 정책에 채찍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와 신사참배가 의무화됐고, 이듬해에는 ‘육군특별지원병령’ ‘국어(일본어) 상용정책’이 실행되었으며 ‘일본국가총동원법’이 조선에도 적용되었다. 일선동조(日鮮同祖). 혈통이 같은 조선 민족은 ‘완전한 일본인’인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어야 했다. 일제는 식민지 사람들과 일본인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자아내 침략전쟁에 동원하고자 했다.

“내지인과 조선인의 씨명을 구별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내선일체의 진전을 위해 가장 유력한 방법의 하나이다.”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의 말마따나 1940년 2월 11일 6개월 시한부로 실시된 창씨개명(創氏改名)은 전시동원을 위한 황민화 정책의 핵심이었다. “씨(氏)와 성(姓)을 잘못 알지 말라. 지금까지의 성은 반드시 남는다”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3월 말까지 ‘조선식 성’을 ‘일본식 씨’로 바꾼 호주(戶主)가 1.07%에 지나지 않자 총독부는 강제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창씨하지 않은 이들은 우선 징용 대상이 되거나 식량배급에서 제외되었고, 자녀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으며, 조선식 이름을 쓰는 학동에게는 체벌이 가해졌다.

군국주의의 광풍 아래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기에 기한인 8월 10일 창씨 율이 80.3%에 달했다. 그러나 높은 비율에도 불구하고 혈통 중심의 가족제도를 깨 민족의식을 앗으려 했던 창씨개명은 가장 실패한 정책이 되고 말았다. 외형적으로 순응하는 척하면서 ‘일족(一族)’임과 조선에 근거 있음을 어떤 형태로든 표시하는 두 글자의 ‘씨’를 만들어 고유의 ‘성’과 같이 기능하도록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김해김씨는 모두 함께 본관인 가나우미(金海)로 창씨했으며, 밀양박씨는 시조가 우물에서 탄생한 전설을 취해 아라이(新井)로 바꾸었다. 일제의 무모한 정책에 순응하는 듯하면서 응하지 않은 그네들의 예지가 자못 슬기롭다. 일제는 강요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기려 귀족원과 중추원 의원인 윤덕영과 한상용 등 친일파 거두들의 경우 창씨에서 제외시켰기에 창씨 여부를 갖고 친일파로 낙인 찍는 것 또한 의미 없는 이분법에 지나지 않는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