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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예술인 활발하게 연결, 글로벌화 디딤돌로 활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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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호 08면

2009년 여름 베니스비엔날레 메인 전시장. 스웨덴의 신예 나탈리 뒤버그(Nathalie Djurberg·32)의 ‘실험(Experiment)’이라는 작품이 관객의 시선을 붙잡았다. 실험적인 현대음악과 애니메이션 비디오ㆍ조각 등을 이용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작품이었다. 아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클레이(일종의 찰흙)로 만든 애니메이션에는 현실 속 부조리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북유럽 특유의 동화적 정서로 응축돼 있었다. 베니스비엔날레 조직위원회는 최고의 젊은 작가에게 수여하는 은사자상을 그에게 안겼다.

문화강국 유럽, 정책 뜯어보기 <3> 스웨덴 미술계를 국제화한 IASPIS

스웨덴 남쪽 말뫼 출신인 뒤버그는 6년 전만 해도 그저 말뫼 지역의 한 비디오 작가에 불과했다. 게다가 글을 읽을 수 없는, ‘디스렉시아’라는 장애도 있다. 2006년 베를린으로 이주한 이후, 베를린비엔날레 등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가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히 작가적 역량과 창의력이 받쳐줬겠지만, 그 배후에 스웨덴 정부 차원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있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현대미술계에서 스칸디나비아 작가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20세기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건축가나 디자이너가 국제적으로 훨씬 그 중요성이 인정됐다. 예를 들어 핀란드의 알바 알토, 마리메코, 덴마크의 아르네 야콥슨 등이다.

이런 가운데 스웨덴 정부는 자신들의 예술을 국제화하기 위해 96년 펀딩 기관이자 예술 에이전트 기관인 야스피스(IASPIS)를 만든다. 정부의 시각예술지원위원회(Visual Arts Funds Committee)에 소속돼 있다. 행정적 측면에서 보자면 매우 독립적이고 예술 지원과 관련된 업무만 진행하는 기관이지만, 재정 예산적으로는 상당한 중요도가 있다. 즉, 스웨덴에서 예술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야스피스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기관이다. 지난 10여 년간 그들은 실무에서 활동하는 작가·큐레이터·비평가들을 기관장에 임명하고, 구체적이고 일관성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작가 지원은 기본적인 업무였다. 젊은 작가들 우선으로 그들의 해외전시 운송·보험·도록 제작 등을 돕고 있다.

야스피스의 설립 목적을 보자. ‘스웨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인들에게 그들의 예술적인 발전을 도와주고 국제적인 작가 및 예술기관, 전문인들과의 연결을 제공해 줌으로써 예술인들의 작업환경을 향상시킨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연결’이다. 펀딩 기관인 야스피스가 ‘작업을 위한 지원금을 준다’ ‘전시 기금을 준다’ 하는 것을 언급하기 전에, 자국 예술인들에게 국제적 ‘네트워크’를 맺어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국제화란 창의적 활동에 대한 지원뿐 아니라 쉽게 정량화될 수 없는 네트워크의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야스피스는 간파한 것이다.
일례로 야스피스는 스톡홀름에 있는 모던 미술관(Moderna Museet)과 연계해 각 분야 전문인들이 모이는 강의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90년대 초반부터 스웨덴 국립방송국에서 미술방송 에디터로 일했고, 현대미술 독립기획자로도 활동하던 퐁투스 키안더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페셔널들에게 가장 선호되는 초청이 야스피스에서의 콘퍼런스나 레지던시 프로그램이었다. 야스피스는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또 서로에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전문인력들을 초청했다. 전문인력들에게는 스웨덴 작가들을 만나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전문가 하나를 초청해도 그들의 관심을 충분히 배려했기에, 서로 윈윈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강의는 공개적으로 많은 이에게 소개된다. 젊은 학생작가부터 비행기를 타고 그 강의를 들으러 오는 ‘고급 학생’들까지 다채롭다.

또 보통의 국제회의나 콘퍼런스들이 갖는 문제점, 즉 문제점을 제안만 하고 헤어져 버리는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이슈를 지속시킴으로써 미술계에 새로운 담론을 만들 수 있었다. 특히 70년대 이후 페미니즘 운동의 중심이었던 스톡홀름에서 새로운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일련의 여성운동과 연계된 강의는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다. 또 90년대부터 스웨덴의 사회적 문제가 된 ‘중동 이주민’ 이슈를 신사회주의적 맥락에서 부각한 것도 돋보였다. 말뫼 같은 지역은 태어난 아이의 40% 이상이 마호메트라고 불릴 정도라 한다. 얼핏 이상적으로 보이는 스칸디나비아의 복지국가가 갖고 있는 새로운 갈등 양상을 화제와 이슈로 삼았던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작가군이 갖게 된 시각과 인식이 다양한 국제비엔날레를 통해 글로벌한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야스피스의 또 다른 주요 업무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1년에 12개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만들어 9개는 스톡홀름에, 3개는 각각 괴텐베르크·말뫼·우메아 지역에서 진행한다. 국제적으로는 베를린·이스탄불·런던·뉴욕·도쿄에 한 개씩 운영하고 있다.펀딩이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들은 항상 ‘선택과 집중’이냐, ‘민주적인 다수 지원’이냐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데, 스웨덴은 전자를 택했다. 정부 기관으로서 감사를 받지만, 전문 위원회를 통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고 자체적으로 빠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구조라는 점도 ‘선택과 집중’에 도움이 된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미술대학을 갓 졸업한 신진 작가와 국제적인 스타작가 1인 초청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스웨덴 작가는 주로 젊은 작가를, 외국 작가는 국제적인 지명이 있거나 다른 문화적 배경이 있는 작가를 소개한다. 초청 작가들은 금전적 지원 이외에, 야스피스의 네트워크를 통한 타국 전시연계 같은 서비스도 제공받는다. 외국 작가일 경우 스웨덴 내 전시 기획에 참여할 수 있으며 작품 제작비도 지원받는다. 이는 국제적으로 야스피스의 위상과 영향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한국에도 소개된 태국 출신의 리크리트 티라바야도 야스피스 레지던시 출신이다.

물론 야스피스도 내재된 문제가 있다. 아마 90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적은 인구의 스웨덴이기에 가능한 구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관의 크기나 지원금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주는 세심함이 지원 기관의 필요충분조건 아닐까. 15년의 역사를 지닌 현재의 야스피스야말로, 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이 그녀의 『글로벌 시티』에서 언급한 유동적이고 영향력을 창출하는 신자본(New Capital)의 개념가치를 실행하고 있는 기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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