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家를 찾아서]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 ‘한명회家’

중앙일보

입력 2010.01.29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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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란 통상 한 집안에서 정치인·관료·학자·기업인 등이 다수 배출된 경우를 말한다.천안·아산에서 명문가로 일컬을 만한 집안을 소개해 본다.

글=조한필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청주한씨 충성공파종친회장 한선교(왼쪽)씨가 조카와 함께 천안박물관서 열리는 ‘한명회 지석 특별전’을 관람하고 있다. 가운데 한명회 초상화가 걸려있다. 지난해 말 청주한씨종친회는 도굴됐다 되찾은 지석을 천안박물관에 기증했다.

세조 등극시킨 희대의 책사 … 35년간 권력 정점에 서다

세조는 한명회를 가리켜 늘 “자네는 나의 자방”이라 했다고 한다. 자방은 한나라 고조 유방을 도와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장량(張良,?~BC168)의 호다. 선견지명으로 유방을 위험에서 여러 번 구했다. 한명회도 세조가 왕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그의 묘는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속창2리에 있다. 경부고속도 상행선을 타고 올 때 천안IC 못 미친 곳, 오른쪽 야산에 보이는 웅장한 무덤이 바로 그것이다.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세조와 예종·성종까지 3대에 걸쳐 왕의 총애를 받으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불리는 영의정을 두번 역임했다. 그는 수양대군(후일 세조)이 김종서·황보인을 제거하는 계유정난(1453년)에 가담한 후 죽기까지 35년 간 당대 최고의 권력가로 군림하며 두 딸을 예종과 성종의 왕비로 보냈다. 호는 압구정(狎鷗亭)이고 시호는 충성공(忠成公).

묘소 앞에 세워진 서거정이 지은 한명회신도비.
24매의 지석 지난해 말 청주 한씨 종친회 충성공파와 중앙종친회는 도굴 당했다 되찾은 한명회의 지석을 천안박물관에 기탁했다. 한선교(74) 충성공파 회장은 “국립중앙박물관, 고궁박물관 등의 기탁요청이 있었지만 묘소와 신도비가 천안에 있어 종친회 판단에 따라 천안박물관에 기탁하게 됐다”고 말했다.

A4용지 크기의 지석은 총 24매, 분청사기로 만들어져 있다. 지석에는 한명회가 맡았던 관직을 시작으로 계유정난 당시 상황, 관직 활동, 가족들 얘기가 담겨 있다. 사후 20년이 지난 1507년 중종의 예장 지시에 따라 지석을 만들어 매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예장은 한명회 묘가 1504년 연산군의 생모 윤씨 복수(갑자사화)와 관련, 부관참시 당하는 수모를 겪은 후 이뤄졌다.

묘 소재지는 현재 행정구역상 천안이지만 조성 당시는 청주에 속한 장명리였다. 1976년 발행된 『청주한씨사감(淸州韓氏史鑑)』에 사망 당시 상황이 전해진다.

한명회가 “나의 선조 고향은 청주요, 나의 고향도 청주이니 내가 죽거든 청주 땅에 묻어달라”고 했다는 것. 당시 나라에선 이 뜻에 따라 원래 천안 땅이던 장명을 일부러 청주 땅으로 편입시켰다고 한다.

이 묘는 해방 전까지 창덕궁 이왕직(李王職)에서 제사 비용을 부담했으며 매년 음력 8월 3일을 금초일로 정해 근처 주민들이 묘소에 모여 풀을 깎았다고 한다.

어느날 묘역에 다른 사람이 몰래 묘를 쓰기 위해 땅을 파려고 했는데 괭이가 연신 자기 다리 옆만 치더라는 것이다. 누가 몰래 묘를 쓰면 반드시 묘지기 꿈에 나타나 알려 줬다고 한다.

한명회 묘역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둘러싸여 있다. 한 회장은 “당시 전국에서 큰 돌을 구하려 했지만 못 구해, 결국 중국에서 구해왔다고 들었다”고 했다.

당대 최고의 책사(策士) 한명회는 세조(1417~1468)를 떼 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는 38세 때 두 살 아래인 수양대군과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친구 권람(1416~1465)을 통해서다. 권람은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있을 때였고 한명회는 과거에 여러번 떨어져 가문의 음덕으로 개성에서 경덕궁직이란 한직에 있었다. 세종 사후 병약한 문종이 즉위해 대신들에 의해 조정이 좌우되고, 문종의 두 동생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힘겨루기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명회는 권람에게 중대 제안을 했다. “나라의 기운이 이미 기울었는데 난을 일으킬 재주있는 자를 얻지 못한다면 어찌 세상을 구하겠는가. 수양대군이 활달하고 용맹스러우니 더불어 대사(大事)를 일으킬 만하다. 조용히 건의해 봄이 어떠한가.”

지석은 거사 당일 상황까지 생생하게 전한다. “수양대군이 칼을 뽑고 말하길 세상에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을 면할 수 없다.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그저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 다른 마음을 가진 자는 이 자리서 벨 것이다.”

서거정(1420~1488)이 지은 한명회 신도비에는 사육신과 관련된 일을 전한다. 세조 즉위 1년 후인 1456년 성삼문·이개 등은 중국사신 환영잔치에서 세조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공(한명회)은 장소가 좁으니 시위 장수는 들지 않는 게 좋겠다고 세조에 말해 허락을 얻는다. 그러나 성삼문 부친인 성승이 칼을 차고 들어가려 하자 꾸짖어 제지하였다. …그 깊은 지모와 원대한 생각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걸 알 수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한명회는 대통령 비서실장격인 도승지로 승진한다.

이후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를 역임하였다. 한명회는 활쏘기를 잘 하는 등 문치보다 병권에 재능을 보였다. 북방을 견고하게 하는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진다. 상당은 청주의 옛이름이고 부원군은 왕가와 사돈을 맺었음을 알려준다. 좌의정을 거쳐 1466년(51세) 영의정이 된다.

그는 예종이 즉위한 해 남이(南怡)장군 ‘역모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또 1등 공신이 되고 영의정에 복직된다. 성종이 즉위한 후 수렴청정에 나선 정희왕후(세조비:인수대비)가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하게 했으나 극력 사양했다. 그러자 정희왕후는 “세조에게서 ‘사직(社稷,나라와 조정)의 신하’라고 불리던 사람이 그럴 수 있습니까”라며 병조판서를 떠맡겼다. 성종 10년~14년 세자 책봉 등으로 세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말년엔 자신의 정자인 한강변 압구정에서 지내다 72세 때 죽음을 맞는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박현모 교수는 “한명회는 명정승의 조건인 정확한 판단력, 친화력과 간명한 말솜씨, 실천적 정치력을 갖췄다”며 “세조 말년 자진 퇴진으로 몸을 낮춰 부담을 덜어주는 지혜를 보였다”고 평했다.

그의 가문 부친 한기(韓起)는 큰 벼슬없이 일찍 죽었고, 할아버지 한상질(韓尙質)은 고려 말 병마절도사·형조판서를 지내고 조선 개국 후 이성계 요청으로 명나라에게 가 ‘조선’이란 국호를 결정받아 돌아온다. 증조부 한수(韓脩)는 고려 충목왕 때 15세로 문과 급제하고 밀직제학·동지밀직을 거쳐 청성군에 봉해진다. 당대 명필로 초서·예서가 뛰어났다.

종조부 한상경은 조선 개국공신으로 도승지·충청관찰사를 거쳐 우의정·영의정을 지낸다. 글씨가 뛰어났다. 정실을 통해 난 아들 한보는 무과에 합격해 좌리공신에 참여해 낭성군에 봉해졌다. 충성공파 후손들은 서천군 서면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한선교 종친회장에 따르면 “한보 할아버지가 서천의 한산 이씨 부인을 맞은 것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수신면 속창2리 한태식씨는 “속창리에 많은 후손이 살았으나 현재 여섯 가구 뿐”이라고 말했다.

■청주 한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로 청주 단일 본이다. 그 연원을 기자조선에 두고 있다. 위만에게 밀려 고조선에서 한반도 마한으로 내려 온 준왕의 8세손 원왕은 3형제를 뒀다. 그 둘째 아들인 우량이 상당(청주의 옛 이름)으로 옮겨와 한씨라 칭했다고 전한다. 한씨의 시조는 우량의 32세손 한란(韓蘭, 853~916)이다. 한란은 고려 태조가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지원, 개국공신이 된다.

후손이 번창하면서 세거지 이름이나 봉군된 곳을 본관으로 분적(分籍)하였으나 오늘날 청주 한씨로 환적하는 추세라 한다. 『청주한씨사감』(P217)에 따르면 30여 파로 나뉘는데 후손이 많은 건 아래 6개 파라고 한다.

천안시 수신면 속창2리 야산에 있는 한명회 묘. 매장 16년 후 부관참시되는 수모를 겪은 후(후손들은 당시 묘막만 태워졌다고 주장) 중종의 예장 지시로 지석이 만들어져 함께 묻혔다.
양절공(襄節公 한확 좌의정 역임)파, 문정공(文靖公 한계희 우찬성)파, 충간공(忠簡公 한리 고려 이부상서)파, 몽계공(夢溪公 한철충 고려 예부상서)파, 관북(關北 한련 예빈윤)파, 충성공(한명회)파 등. 이중 몽계공파 자손들이 천안 병천 매성리에 많이 살고 있다.

조선 조 가장 많은 6명의 왕비를 배출했다. 파평 윤씨, 여흥 민씨는 4명이다. 청주 한씨는 최근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한명회가 두번 맡았던 영의정에 견주는 국무총리를 한덕수·한명숙·한승수씨가 역임했다. 한승주 전 주미대사, 한승헌 전 감사원장도 있다.

천안시에는 한동흠 공보관, 한대길 서북구 자치행정과장(이상 충성공파), 한상국 건설도로과장 등이 있다. 그외 한상익 전 천안경찰서장(충성공파), 제1공화국때 국회의원인 한희석(천안군 을)씨 등이 있다.

■천안박물관에 기증한 지석

한명회 지석은 총 24매로 출생 관련 얘기, 관직 활동, 가족 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지난해 말부터 천안박물관에서 한명회 지석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 지석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2000년 2월 김모씨에 의해 도굴돼 황모씨에게 720만원에 팔리는 등 여러 단계를 거쳐 충북 청원의 골동품상 유모씨에게 넘어갔다.

유씨는 지석 24점 모두를 지난해 4월 J씨에게 5억원에 팔아넘기려다 6월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의해 검거돼 유물 모두가 청주 한씨종친회에 인계됐다. 지석은 가로 25㎝, 세로 30㎝, 두께 2.5㎝ 크기로 한 회장에 따르면 이천의 도요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감정됐다. 조선시대 고관이 사후 무덤에 지석을 남긴 경우는 흔했지만 이처럼 많은 양(24장)은 드물다.

글을 지은 최숙생(1457~1520)은 대사간·대사헌을 역임하고 우찬성에 오른 인물이다. 그 지석 말미에 “공의 손자와 친교를 나누지 오래돼 이 글을 쓰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재미있는 내용이 여럿 보인다.

4번째 지석에 한명회의 출생 얘기가 나온다. “배 위에 검은색의 북두 모양(台符斗拯) 점이 있었다.” 신도비에는 “임신한지 일곱 달만에 낳으니 신체가 완비되지 못하여 온 집안이 괴이하게 여겨 거두려 하지 않았다. 늙은 여종이 성실히 수개월 동안 보살피니 점점 자라나 점점 의젓해졌다”고 쓰여 있다. 종조부 한상덕 참판은 일찍 부모를 여읜 한명회를 맡아 기르면서 “이 아이가 후일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당시 영의정 황보인이 한번 보고 ‘국사(國士)’라 하여 딸을 시집보내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임종을 맞아 성종이 내관을 보내니 왕에게 ‘유명한’ 유언을 남긴다.(19번째 지석) “처음에 부지런하고 나중엔 게으른 것이 인지상정이오나 원하건대 나중을 삼가길 처음처럼 하소서(始勤終怠 人之常情 願愼終如始).” 이 유언은 조선왕조실록·신도비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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