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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첫돌 맞은 실버영화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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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어제 오후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4층 ‘허리우드 클래식관’에서 ‘실버영화관’ 개관 1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김수용·최은희씨 등은 ‘다시 만난 추억 스타’ 순서에 참석하러 모처럼 나들이를 했다. 극장의 320여 좌석이 남녀 노인 관객들로 꽉 들어찼다. 단성사·피카디리와 함께 뭇 청춘들을 끌어 모았던 왕년의 허리우드극장의 인기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최씨는 “안 그래도 이 거리를 지날 때는 기분이 이상했거든요. 오늘도 가슴이 떨리고 기분이 너무너무 이상해요”라고 소녀처럼 말했다. 영화관 로비에는 흘러간 한국영화 포스터들이 전시돼 있었다. ‘청실홍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마부’ ‘오발탄’ ‘벙어리 삼룡’ ‘맨발의 청춘’…. 1977년작 ‘겨울여자’ 포스터에서는 긴 생머리의 젊은 장미희씨가 환하게 웃는 모습 아래 장씨가 웃통을 벗은 김추련씨의 등에 살포시 몸을 기댄 70년대식 ‘야한’ 장면도 들어 있었다. 그래. 그때는 이런 정도의 사진만 보아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었지.

‘실버영화관’은 57세 이상 남녀에게 2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국내외 고전영화를 틀어준다. 보통 65세 이상이 ‘노인’에 해당되지만 50대 후반 정년을 맞아 직장을 나와서 파고다공원 등에서 하릴없이 소일하는 이들이 많은 점을 감안해 몇 살 더 낮추었다. 노인복지관에서 무료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도 있고,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배려해 영화를 보고 난 입장권은 부근 식당과 떡집·이발소에서 500원씩 깎아주는 할인권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

노인영화관 아이디어를 낸 이는 젊은 김은주(36·여·허리우드클래식 대표)씨다. “서대문 화양극장에서 고전영화 상영 일을 했거든요. 그런데 어르신들이 정말 좋아하시는 거예요. 노인들은 ‘아바타’ 같은 영화는 어지럽고 정신 사납다고 꺼리세요. 일반 영화관은 젊은이들한테 치이니까 불편해하시고요.” 김 대표는 ‘옛날 영화를 옛날 가격으로’라는 원칙을 세우고 작년 이맘때 허리우드 클래식관을 열었다. 호응은 폭발적이었지만 수지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입장료가 싼 데다 옛날 영화를 구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영화 판권은 100만~200만원이면 되지만 외국영화는 적게는 1000만원에서 5000만원까지 들었다. 영화관 설립 취지에 공감한 SK케미칼이 조건 없이 후원해준 덕분에 근근이 유지해 왔는데, 올해부터는 서울시가 노인복지 차원에서 연 3억원을 대기로 해 다소 숨통이 트이게 됐다.

어제 개관 1주년 행사에서 상영된 영화는 신영균·고은아·황정순·이낙훈 등이 출연한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이었다. 영화관을 메운 남녀 노인들과 옛날 영화 포스터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낡은 계단을 내려와 거리에 나서니 마치 타임머신을 탄 뒤끝 같은 느낌이었다. 종로 거리를 가득 채운 밝은 표정의 남녀 젊은이들은 이웃 낙원상가 4층의 노인 관객들이 자신들의 근(近)미래라는 사실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 것일까.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