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며…] 단풍 잔치 흥겨운 상원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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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계곡 물이 흐르며 바윗돌마다 휘감아 맑은 소리를 내고, 햇살은 기울며 나뭇잎마다 스며 울긋불긋 단풍물을 들였다.계곡을 따라 산으로 오르는 길섶에는 쑥부쟁이의 활짝 핀 꽃잎이 연붉고,개망초 꽃은 튀밥처럼 하얗게 속을 터트렸다.

당단풍·쪽동백·까치박달·물푸레·거제수·서어·느릅 등 나무들이 치악산 남쪽 끝자락의 상원골에서 빨강·노랑·갈색·주황·연초록으로 오색의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독야청청하던 소나무도 가지마다 맨밑의 솔잎을 노랗게 물들여 단풍 잔치에 적으나마 부조를 한다.길바닥에 깔린 낙엽에서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숭늉처럼 고소한 냄새가 감도는데….

이른 아침 어느 암자에서 행선(行禪)을 나선 길인가.감은 듯 만 듯한 눈길을 하고 느릿느릿 내려오는 비구니 스님의 화두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오욕 칠정을 탈색한 잿빛 승복을 입었지만,눈뜨면 단풍이 오욕(五欲)처럼 현란하고 눈감으면 낙엽 냄새가 칠정(七情)처럼 웅숭깊은데,산새의 지저귐까지 귀를 파고드니 그 즐거움을 어찌하나.

높은다리부터 한 시간 반쯤 길동무해 주던 계곡의 물소리가 된비알을 만나자 더는 못 가겠다고 등뒤로 잦아든다.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부부도 조용해지고,남편을 따라 오르느라 숨이 가쁜 부인의 얼굴이 불그레 홍조를 띤다.

산길 좌우가 더욱 붉어짐은 단풍 또한 가풀막이 힘들어서인가.아니면 목숨을 구해 준 선비에게 은혜 갚음 하느라 상원사 종을 머리로 쳐서 울린 꿩 세 마리의 피를 기억함인가.

당단풍나무가 당당하게 일편단심을 뽐내지만 생강나무도 널따란 잎이 샛노란 게 결코 지지 않는다.오르막 내내 빨강과 노랑의 경연이 벌어질 때마다 산객들은 턱에 차오르던 숨을 죽이고 색깔에 취한다.너나없이 자신도 모르게 화가가 되어,마음의 도화지를 펼치고 꿈꾸는 눈길로 색칠을 한다.

상원사 바로 못미처 아름드리의 들메나무와 물푸레나무가 서 있는 쌍룡수 샘터에 닿았다.하늘을 가린 나뭇잎이 온통 노르스름하고 바닥에 깔린 잎들도 색이 바래지 않은 숲속의 샘터다.다람쥐가 먼저 와 있길래 차례를 기다려 물을 마셨다.

한 모금,두 모금….차가운 감로수에 단풍의 취기가 겨우 깨는 것 같다.

나뭇잎의 나무와 잎이 이별 잔치를 벌이는 게 단풍 아닌가.겨울 칼바람이 불기 전에 그보다 더 매서운 강단으로 떨켜를 만들어 살을 도려낸다.

지금 비치는 햇살이 좋아서가 아니라 나중에 올 추위에 대한 예감 때문에 고통의 축제를 펼친다.

남대봉·향로봉·곧은재·비로봉을 넘어 험악한 사다리병창으로 하산한 뒤 다시 삶의 비탈을 오르려면,내 마음의 세포에는 얼마나 많은 떨켜를 만들어야 할까.

배두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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