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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16세기로 내닫는 폭주기관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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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연산군 때, 실록편찬의 최고책임자 이극돈은 깜짝 놀랐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빗댄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사초에 오른 것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왕권과 밀접한 척신세력은 왕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사림파를 색출했다. 주동자 김일손과 정여창은 효수되었고, 사림(士林) 수십 명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사림의 총수 김종직의 무덤은 파헤쳐져 부관참시됐다. 조선은 16세기를 유혈이 낭자한 사화(士禍)로 문을 열었다.

이른바 ‘사화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중종 때, 조광조의 급진개혁에 대한 반정공신들의 반격은 급기야 칼바람을 불러 30대 신진관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집권 실세 내에서 벌어진 논리다툼이 아름다운 화해로 끝나는 적은 없었다. 논리가 다르면 이단(異端)이었고, 이단은 죽음을 의미했다. 붕당정치가 시작된 선조 때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대립해 청환(淸宦)·요직(要職)과 통치철학을 두고 접전했다. 동인은 수기(修己)와 도학정치를 제일로 치는 경상도 신진 사대부들이었던 반면, 서인은 서울·경기지역에 근거를 둔 세력으로 치인(治人)과 부국안민을 신조로 삼았다.

사대부의 통합적 덕목인 ‘수기(修己)/치인(治人)’이 대립했고, 통치원리의 양면인 도덕성/현실성이 각각 충돌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도 정치는 수기-치인, 명분-실익 간 붕당 충돌로 일관했다. 격쟁은 언제나 사약과 유배로 끝났고, 결과는 국운에 악영향을 미쳤다.

미생지신(尾生之信) - 중국 고사에 나오는 미생의 죽음을 두고 엇갈리는 한나라당의 균열이 어쩌면 그렇게 16세기 조선의 붕당정치를 닮았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얘기를 꺼낸 정몽준 대표는 ‘어리석은 죽음’이라 했고, 박근혜 전 대표는 ‘의로운 죽음’이라 했다. 이게 인문학자들의 논쟁이라면 ‘우사론(愚死論)’과 ‘의사론(義死論)’으로 개념화되어 학계를 풍요롭게 했을 터이지만, 국가 대사를 가름할 정치분쟁, 그것도 집권정당의 내부 균열을 증폭하는 격쟁이기에 그냥 지나칠 사안이 아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치는 정치가 아님을 못 박는 박근혜 전 대표는 ‘원칙과 신뢰’ 곧 수기(修己)를 고수하는 반면, 정몽준 대표는 국가와 지역민에게 더 많은 보탬이 되는 ‘실익(實益)추구’가 치인(治人)의 핵심이자 세종시 수정안의 정당한 근거임을 내세운다.

‘우사(愚死)와 의사(義死)’ ‘실익과 신뢰’의 충돌은 16세기 붕당정치를 발화시킨 그 논리와 상동구조이고, 접점을 못 찾고 격화되는 내부 분쟁이 급기야 분당이라는 파국 상황으로 몰려가는 양상은 고매한 선조들이 이제는 통탄해 마지않을 그 못난 붕당정치를 현대의 정치수장들이 답습하는 것 같아 한심스러운 생각마저 든다. 게다가 각 분파가 타협점을 찾기보다 입장 사수로 치닫게 되는 그 배경에 차기 대권이 놓여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괘씸하기까지 하다.

조선은 원래 공론(公論)정치였지만, 명분과 의리를 좇는 사대부 집단이 타협의 여지를 막아버렸다고 이해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갈등 해소를 위한 온갖 세련된 규칙과 제도가 마련된 21세기 민주정치에서 죽을힘을 다해 서로 쪼아대는 투계(鬪鷄)의 모습을 원색적으로 노출해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정당은 원래 이념을 달리하는 붕당이다. 붕당들이 격돌해도 파열음을 내지 않게 설계된 것이 현대의 정당정치다. 만약 유럽의 정치수장들이 우리 같았으면, 정당이 5개에서 20개까지 난립한 유럽국가들은 진작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유럽이라고 왜 천도론 내지 수도분할론과 같은 국가 중대사안이 때로 제기되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막후교섭, 정당 간 연합, 연대, 일시 제휴 전략을 적절히 구사해 착종(錯綜) 상황을 뚫었는데, 불화나 이견충돌로 지배정당이 쪼개지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여당 내 친이(親李)·친박(親朴)의 격돌이 경선 후유증과 총선 공천과정에서 비롯되었고, 야당의 저 야단스러운 공세가 세 확장 내지 차기 대권을 노린 것이라면, 타협의 여지를 찾으라는 각계각층의 충고는 휴지 조각만도 못한 게 요즘의 정치판이다. 그런데, 정지작업이나 막후교섭도 없이 정부는 입법예고를 공식화했다. 뭔가 가능할까? 단언하건대, 세종시 시비는 집권정당을 쪼갤 것이고, 야당을 사나운 공격견으로 만들 것이며, 적어도 2~3년간 국민들을 소란한 정쟁에 몰아넣을 것이다. 그렇다고 붕당들로 가득 찬 국회가 세종시 문제를 원만히 풀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은 적다. 세종시 문제에 관한 한 정치는 이미 16세기 조선으로 내닫는 폭주기관차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에겐 다행히 조선에는 없었던 정치적 해결책, 국민투표라는 방식이 있다. 정치가 풀 수 없다면, 국민이 풀어야 한다. 세종시 논란이 천도(遷都)문제로부터 발원되었기에 최종 결재자는 국민이어야 마땅하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