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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문] 김현철 전 삼미그룹 회장

중앙일보

입력

그는 한때 서울 종로 삼일빌딩의 주인이자 ‘수퍼스타 감사용’이 소속했던 야구단 구단주였다. 특수강으로 세계를 제패하리라 꿈꿨던 야심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과 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좌절했다. 그리곤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옛 삼미그룹 2대 회장 김현철이다.

선교사로 변신한 그를 지난 14일(현지시간) 지진 참상의 현장 아이티 포르토프랭스로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났다. 그는 6만 달러어치 의약품·식량을 전하러 온 한국기독교연합 봉사단의 길잡이를 자처했다. 2004년부터 아이티와 맞닿은 도미니카에서 부인과 함께 선교사로 일해온 경험 덕이었다. 수도 산토도밍고엔 그가 세운 ‘월드그레이스미션’이란 선교회가 있다. 포르토프랭스에도 선교회와 병원·기술학교를 세우려 하던 중 지진이 일어났다.

다섯 차례 포르토프랭스를 다녀왔지만 그에게도 이번 여행은 쉽지 않았다. 2002년 두 차례 직장암 수술 후 대변주머니를 차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권총강도까지 당했다. 14~18일 그와 포르토프랭스를 함께 다녀온 뒤 19~20일 산토도밍고에서 다시 만났다. 95년을 끝으로 국내 언론에서 사라졌던 그가 그동안 삶의 여정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포르토프랭스에는 왜 가셨나요.

“지진 다음날인 13일 한국기독교연합 봉사단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포르토프랭스에 긴급 구호물자를 가져가는데 길안내를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튿날 만났죠. 그런데 현지사정을 너무 모르는 거에요.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포르토프랭스에 세우려는 선교회 터도 볼 겸 같이 가기로 한 거죠. 우리 선교회에 버스와 트럭이 있어서 그걸로 움직였습니다.”

-권총강도를 만나셨다죠.

“빈민층 지역인 시티솔레이에 있는 병원에 의약품을 전하러 가던 길이었어요. 트럭처럼 생긴 현지 택시인 ‘탑탑’을 타고 가고 있는데 현지인 두 명이 올라타는 거에요. 자리에 여유가 있어서 그냥 뒀죠. 잠시 동정을 살피더니 권총을 꺼냅디다. 소지품을 다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일행 중 한 분은 여권도 빼앗겼어요. 현지를 잘 아는 우리도 이렇게 당했습니다. 요즘 한국 선교단체나 개인이 직접 포르토프랭스로 가려고 하는 분이 많습니다. 뜻은 좋지만 자칫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요. 지금은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면 다들 무관심해질 거에요. 그럴 때 도와주는 게 더 절실할 수도 있지요.”

-그런 일이 잦습니까.

“2005년에도 겪었어요. 그땐 짚 두 대가 갔습니다. 아내도 동행했죠. 포르토프랭스 현지 선교사가 지름길을 안다며 뒷골목으로 들어갔어요. 그러다 장총을 든 10여명의 떼강도를 만났습니다. 낌새를 알아차린 뒤차가 후진을 하니까 총을 막 쏴대는 거에요. 다행히 뒤차는 빠져나가고 우리만 잡혔죠. 강도 한 명이 총개머리판으로 유리창을 모두 깨더니 내리라고 고함을 치더군요. 다 내렸는데 난 그냥 있었어요. 몸이 불편해 못 내리겠다고 버텼죠. 왜 그랬는진 모르겠어요. 그랬더니 총구로 옆구리를 막 찌르더군요. 그러든 말든 가만 있었더니 그냥 둡디다. 난 2002년에 죽었다 살아난 목숨이니 겁날 게 없었어요. 아이티 선교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83년 버마 아웅산 폭탄 테러 때도 운 좋게 현장을 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초 우리도 아웅산 묘소에 참배하도록 돼있었어요. 그런데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버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건의를 합디다. ‘기업인들까지 아웅산 묘소에 갈 필요가 있느냐. 우리는 현지 기업인들과 골프를 하게 해달라’고 말이죠. 전 대통령이 듣더니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그때 전 대통령이 안 된다고 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없겠죠.”

-신앙인이 되신 계기가 있나요.

“2002년 우연히 대장검사를 했다가 직장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너무 커서 수술이 어려우니 일단 방사선·항암제 치료를 해 크기부터 줄이자고 하더군요. 한달 반 동안 항암제 투약기구를 몸에 달고 다녔습니다. 처음엔 담담했죠. 친구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를 했더니 “지금 누구 얘기냐”고 물었을 정도에요. 한데 막상 수술하러 가는데 ‘암센터’라는 간판이 보이니까 눈물이 핑 돌더군요. 수술은 잘 됐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뒤 수술부위가 터져버렸어요. 응급실에 실려갔죠. 몽롱한 와중에서도 ‘이젠 끝이구나’ 싶더군요. 그때 신에게 매달렸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남은 인생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맹세했죠.”

-선교사 교육은 따로 받은 겁니까.

“회복된 뒤에 하와이에 있는 선교사 교육센터에 들어갔습니다. 석 달 교육을 받고 다시 두 달여 태국으로 전도여행을 다녀왔죠. 그때까지도 선교사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도미니카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미국 캘리포니아 얼바인의 한 교회에서 이왕 갈 거면 선교사 파송을 받으라고 합디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그 교회 1호 선교사가 됐죠. 초고속 파송을 받다 보니 ‘낙하산 선교사’라는 놀림도 받아요.”

-첫 부임지가 도미니카인데.

“95년에 모든 걸 던지고 캐나다로 갔습니다. (김 회장은 95년 12월 19일 둘째 현배씨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캐나다 법인 대표로 갔다.) 처음엔 영주권 신청도 안 했어요. 캐나다 법인 대표였으니까요. 그런데 96년 동생이 캐나다 법인을 포항제철에 넘기기로 했다는 거에요. 캐나다 법인을 팔아버리니 내 신분이 공중에 떴어요. 캐나다에 머물 수 없게 된 거죠. 부랴부랴 영주권 신청을 했습니다. 설상가상 97년 그룹이 부도가 났어요. 동생은 물론 나까지 기소 당하고 출국정지자 리스트에 올랐어요. 캐나다 영주권도 물거품이 됐죠. 소송까지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여권 만료기간은 다가오고 해서 급하게 알아봤더니 도미니카 이민이 비교적 쉽더군요. 그래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 하나님이 아이티로 가게 하려고 예정하신 것 같아요.”

-95년 갑자기 회장직에서 물러나신 걸 두고 세간에서 추측이 분분했습니다.

“만 29세에 회장이 돼 많이 하기도 했고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거라 동생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죠. 그런 차에 95년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터졌습니다. 검찰이 오라 가라 하며 언론에 공개해 갖은 망신을 주더군요. 참담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며 기업을 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나미가 뚝 떨어지더군요. 그래서 떠나기로 한 겁니다.”

-회장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쉽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쉽지 않았죠. 그런데 할아버지·아버지께서 다 일찍 돌아가셨다는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마음도 있었고.”

-떠나시고 난 지 2년 만에 그룹이 부도가 났습니다.

“지금도 그건 납득할 수 없어요. 당시 삼미는 1조4000억원 정도 빚이 있었습니다. 그걸 해결하려고 동생은 삼미특수강 절반을 포항제철에 팔았습니다. 7000억원 정도 받았죠. 그걸로 빚을 갚아서 부채비율이 100% 정도에 불과했어요. 캐나다 법인도 포철에 넘긴 상태였고요. 남들 다 하던 분식도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 덩치를 줄여 빚을 갚은 게 실수였던 것 같아요. 마침 한보철강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나와 이름이 같은 김영삼 대통령 아들이 한보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거였죠. 한보가 부도나고 은행임원 4~5명이 구속됐습니다. 그러자 은행들이 한꺼번에 대출을 죄고 들어왔습니다. 부도를 내도 충격이 덜한 회사를 찾다 보니 삼미가 희생양이 됐습니다. 삼미특수강은 당시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가진 회사였어요. 부도가 나도 막아줘야 할 은행이 앞장서 부도를 낸 거죠. 그후로 한동안 골프공만 쳤습니다. 이건 누구 얼굴, 저건 누구 얼굴 떠올리면서. 거기다 영주권 문제까지 겹쳤으니 병이 안 났으면 이상했던 거죠.”

-그룹 부도 후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회장직 사퇴를 알리러 은행에 갔더니 연대보증은 풀어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알았다고 했는데 그게 발목을 잡았습니다. 부도 후에 모든 재산이 은행에 압류가 됐죠. 아이가 셋인데 앞으로 어떻게 하나 막막했어요.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더군요. 중학교 동기였던 캐나다 법인 지사장이 퇴직금 40여 만 달러를 줬어요. 그 돈으로 뭐할까 궁리하다 우연히 주식투자 안내서를 봤죠. 이거다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미국 주식을 사기 시작했는데 주가가 막 날아가는 거에요. 사기만 하면 몇 배씩 올랐죠. 그 덕에 살았습니다. 계속 투자를 했다면 나도 다 날렸을 텐데 결정적인 순간에 아내가 제동을 걸어줬습니다. 도미니카에 선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죠. 이후론 주식과 인연을 끊었어요.”

-무거운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부인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경기중학교를 졸업했는데 경기고 시험에 떨어졌어요. 창피해서 삼촌이 있는 시애틀로 갔죠. 거기서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까지 다녔습니다. 대학 3학년 때 군에 입대했는데 1년 만에 의가사제대를 했습니다. 그러고 집에 와 있었죠. 마침 그때 이화여대 합창단이 시애틀에 들렀습니다. 안내를 하러 공항에 나갔더니 끈이 떨어진 가방이 있더군요. 여학생이 들긴 힘들겠다 싶어 차로 옮겨 줬는데 그 가방 주인이 아내였습니다. 72년 메이퀸이었죠. 그 인연으로 가끔 편지를 주고 받다가 내가 캐나다 밴쿠버로 가면서 연락이 끊겼습니다. 아쉽던 차에 한국에서 의가사제대 재검을 받으라는 연락이 왔어요. 잘됐다 싶었죠. 재검을 받은 뒤 무작정 이대 성악과로 찾아갔어요. 그리곤 전화번호를 알아냈습니다. 막상 결혼하려니 3대째 기독교 집안이었던 처가에서 결사반대 했어요. 당시 우리 집안은 불교였기 때문이죠. 장모님을 설득하려고 교회에 나갔던 게 처음 하나님과 인연을 맺은 계기가 됐어요. 결국 74년 결혼했죠.”

-입사 후 초고속 승진한 걸로 압니다만.

“대학 졸업 후 한국에 왔는데 막 특수강 공장 증설을 하려던 찰나였어요. 그런데 다른 회사는 알아보지도 않고 일본 히타치에서 7000만 달러어치 기계를 사온다고 하는 거에요. 젊은 패기에 왜 그러느냐고 반대했죠. 딴 데도 알아보자고요. 한데 씨도 안 먹혀요. 밤샘을 해가며 미국·유럽회사 제품을 알아봤습니다. 그랬더니 견적이 일본제품 절반 값도 안 나오는 거에요. 그걸 들고 담당 부장을 찾아갔습니다. 아래위로 신망 받는 분이었죠. 그분을 설득해 유럽 출장을 갔어요. 가서 보니 내 말이 맞았죠. 그래서 3000만 달러에 증설을 끝냈습니다. 그 덕에 대리에서 단번에 차장으로 뛰었습니다.”

-특수강사업에 뛰어든 건 언제였습니까.

“75년 박정희 대통령이 창원에 특수강 공단을 만들었습니다. 무기 국산화를 위해서였죠. 기존 철강회사들에게 특수강사업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손사래를 쳤습니다. 첨단 특수강은 무리라고 했죠. 고육지책으로 박 대통령이 아버님을 불렀습니다. 국가를 위해 맡아달라고 했죠.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불모지였죠. 그나마 캐나다 밴쿠버에 있을 때 일본 마루베니라는 특수강 회사 공장에서 8개월 연수했다는 경력 덕에 내가 새 사업체 이사로 가게 됐습니다.”

-기술 개발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독일에서 공부하신 윤직상 박사라는 분이 결정적으로 기여했어요. 일본을 이겨보자며 의기투합이 됐죠. 독일기계를 들여와 수도 없는 시행착오 끝에 자동차와 대포·M16에 들어가는 특수강을 개발했습니다. 77년 공장 증설까지 끝내고 양산을 시작했죠. 현대자동차가 포니를 미국에 수출할 수 있었던 건 삼미특수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일본제품을 사다 썼다면 아마 수출경쟁력을 갖출 수 없었을 겁니다. 윤박사는 두고두고 그걸 자랑으로 여겼죠. 그 덕에 나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79년엔 대표이사 사장까지 올라갔죠.”

-선대 회장께서 일찍 경영권을 넘겨주셨는데.

“한참 그룹이 잘 나가던 77년 아버님이 골수암 진단을 받았어요. 당시만 해도 암치료에 쓰는 인터페론이 귀했죠. 핀란드까지 날아가 구해왔어야 했어요. 이 때문에 내가 경영일선에 나서게 됐고 80년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만 29세에 회장이 됐죠. 당시 쌍용 김석원 회장과 한화 김승연 회장도 젊은 나이에 그룹 총수가 됐어요. 세간에서 ‘재계 3김’이라고 불렀죠.”

-회장이 되신 뒤에 사업을 많이 벌리셨죠.

“특수강 생산이 늘어나 이를 자체적으로 소화할 특수강 소비회사를 세웠습니다. 해운업도 화물로는 1위가 됐고요. 82년엔 프로야구단도 창단했습니다.”

-삼미그룹은 소비재가 없었는데 야구단 창단은 좀 의외였습니다.

“당시 부산은 롯데, 광주는 해태, 대구는 삼성, 대전은 OB, 서울은 MBC가 차지했는데 인천·강원엔 아무도 나서질 않았어요. 팀이 6개가 돼야 하는데 5개로는 곤란했죠. 프로야구가 될 것도 같고 야구협회 사무총장이 안쓰럽기도 해서 발표 전날 전격적으로 결정했어요. 프로야구는 나한테 빚이 있다고 봐야죠. (웃음)”

-삼미 슈퍼스타즈 성적은 좋지 않았습니다.

“준비 없이 창단한 데다 인천·강원엔 우수선수도 부족했습니다. 첫해 18연패에 꼴찌라는 수모를 당했죠. 얼마 전 ‘수퍼스타 감사용’이란 영화도 나왔더군요. 그랬더니 오기가 나는 거에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찾아갔습니다. 회장님 선수 좀 주십시요 그랬죠. 그래서 데려온 게 정구왕 선수였습니다. 다른 팀은 아예 말도 꺼내지 말라고 합디다. 우리에겐 재일교포 선수 두 명을 데려올 옵션이 있었어요. 워낙 실력이 달리니 야구협회에서 우리에게만 그런 권리를 준 거죠. 일본에 있는 장훈씨를 통해 데려온 게 장명부와 이영구 선수였습니다. 장명부가 온 뒤로 기적이 일어났어요. 장 선수는 그해 30승을 올렸죠. 꼴찌였던 슈퍼스타즈가 이듬해 전반기 1위로 치고 올라간 거에요. 한데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딱 맞더군요. 당시 감독이 김진영씨였는데 좀 다혈질이었어요. 서울운동장에서 MBC 청룡과 붙었는데 심판 뒤에서 보호막을 걷어차며 거칠게 심판 판정에 항의를 한 거에요. 하필 그 장면을 전두환 대통령이 보고 “저거 뭐냐”고 한 마디 하자 김 감독이 구속돼 버렸죠. 감독이 빠지니 바로 2등으로 밀립디다. 부랴부랴 후임으로 백인천씨를 스카우트해왔어요. 초반엔 잘 했는데 백 감독조차 불미스런 일로 물러나 결국 1등을 못해봤어요.”

-야구단을 85년 매각한 이유가 있었나요.

“80년대 초 오일쇼크가 왔습니다. 그 바람에 주력회사였던 해운과 목재가 어려워졌어요. 세계 제일 목표를 너무 거창하게 세웠던 거죠. 삼일빌딩을 산업은행에 팔았고, 해운업은 범양상선에 넘겼습니다. 야구단은 청보 김정우 회장에게 매각했습니다.”

-오일쇼크를 넘기고 나선 어땠나요.

“뼈아픈 구조조정 덕에 특수강은 튼튼해졌습니다. 그 뒤로 5년 동안이 삼미가 가장 견실했던 시기였습니다. 88년 기업공개를 했는데 청약 열기가 뜨거웠죠. 89년 캐나다 최고 특수강 회사를 인수하면서 100년 된 미국 자회사도 손에 넣었습니다. 명실상부하게 특수강에서 세계적 회사가 됐죠. 기업가로선 그때가 가장 신바람 났던 것 같습니다. 세계 2~3위까지 올라섰죠. 1위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미국 공장에서 계속 신기술이 개발되니까 일본회사들이 부러워했죠. 그런데 다시 경기가 나빠지면서 북미공장이 적자를 냈고 이로 인해 자금이 말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났고 세계 1위 꿈도 접어야 했죠.”

-자녀도 건강이 안 좋다고 하던데요.

“맏딸은 거식증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어릴 때 발레를 시켰는데 너무 잘하려고 하다 보니 그랬던 것 같아요. 게다가 사위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서울대 병원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어요. 장남은 몇 년 전 뇌에 바이러스가 들어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고쳤는데 지난해 여름 재발한 거에요. 그때 아들이 근본적으로 변하더군요. 과거 잘못을 회개하고 진정한 신앙인이 됩디다. 남들은 자식 이야기를 창피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생각이 달라요. 많은 분이 알고 기도해주면 그만큼 힘이 되는 거죠. 여러분의 기도 덕분에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막내는 재미있는 친구에요. 브라운대 생물학과를 나왔는데 음악을 한다며 음악학교를 다시 다녔죠. 뉴욕에서 박진영씨가 운영하는 JYP에 인턴으로도 일 했어요. 그 덕에 외손녀가 원더걸스 사인이 들어간 앨범을 선물로 받고 얼마나 기뻐하던지.”

-삼미그룹 회장 때와 지금 어느 쪽이 행복하신가요.

“15년 회장 하면서 행복했던 건 우리가 세계 1위를 할 수 있다는 꿈을 꿨던 잠시뿐이었던 것 같아요. 나머진 스트레스와 고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되고 나니 반대에요. 모든 걸 내려놓으니 늘 행복해요. 아버님이 이룬 삼미그룹을 지키지 못한 게 걸리지만 이젠 그마저 내려놨어요. 회사는 사라진 게 아니니까요. 꼭 내가 해야 한다는 욕심만 내려놓으면 말이에요.”

-앞으로 계획이 있습니까.

“아이티에 선교센터와 함께 병원·기술학교를 짓는 겁니다. 원래 남부 플로리다 감리교회에서 시작했던 건데 제가 소속한 월드그레이스미션과 남가주 늘푸른 선교교회가 합세해 곧 착공할 겁니다. 이번에 포르토프랭스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힘을 보태고 싶다는 연락이 많이 오고 있습니다. 당장 먹을 물과 식량도 급하지만 아이티는 길게 봐야 합니다. 한번으로 끝나는 구호 말고 그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손을 잡아주는 게 절실합니다.”

포르토프랭스(아이티) 산토도밍고(도미니카)=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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