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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왕위이양 ‘쇼’ , 4살 세자는 석고대죄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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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함춘원지의 함춘문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 사당을 창경궁 동쪽 후원 함춘원으로 이전하고 경모궁으로 개명했다. 일제는 1924년 이 자리에 경성제대 의학부를 건설하면서 그 원형을 파괴했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병원 자리다. 함춘문은 경모궁으로 가는 문이다. 사진가 권태균

세자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당선자다. 다만 현재의 임금이 사망해야 즉위하기 때문에 즉위 날짜를 모른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당선자와 다를 뿐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세자는 시강원에서 왕도교육을 받으며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擇君)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세자 역시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 결정판이 사도세자다.

절반의 성공 영조⑦ 사도세자(上)

영조 38년(1762)에 있었던 사도세자 살해사건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하는데 현재도 많은 이들이 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홍씨의 『한중록』이 과거 국어교과서에 실린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홍씨와 다른 시각의 사료는 배제되었다. 그 결과 세자의 정신병이 ‘뒤주의 비극’을 낳았다는 홍씨의 시각만 유통되었다.

『한중록』은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其一)은 홍씨의 회갑 때인 정조 19년(1795) 쓴 것이고, 2편(其二)과 3편(其三)은 67∼68세 때인 순조 1∼2년(1801∼1802), 4편(其四)은 71세 때인 순조 5년(1805)에 각각 쓴 것이다. 『한중록』은 정조의 생존 때 쓴 1편과 정조의 사후에 쓴 2~4편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1편은 주로 사도세자와 자신의 친정이 사이가 좋았음을 묘사한 뒤 “불행히 임계년(영조 28~29년)에 병환 증세가 계셨다”고만 언급했을 뿐 세자의 정신병이 비극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지 못했다.

사도세자 사당 전남 무안군 운남면 동암마을에 있는 사도세자 사당. 정조 때 마을 사람들 꿈에 사도세자가 여러 차례 나타나 이 마을에 살겠다고 말한 것을 계기 삼아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사진가 권태균

반면 손자인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쓴 2~4편에서는 사도세자의 정신병과 비행을 적극적으로 거론했다. 예를 들면 “외인(外人)이 모년사(某年事: 사도세자 사건)로 ‘여차여피(如此如彼)하다’ 하는 것은 다 맹랑무계한 이야기요, 이 기록을 보면 모년 시종(始終)을 소연(昭然)히 알 것이요”라며 『한중록』만이 사건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저 이 일로 영묘(英廟: 영조)를 원망하며, 경모궁(景慕宮: 사도세자)이 병환이 아니시라 하며, 신하를 죄 있다 하여서는 비단 본사(本事)의 실상을 잃을 뿐”이라고 말했다. 세자의 병이 비극의 주된 요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죄 있는 신하’에 친정 아버지 홍봉한이 포함된 사실을 알아야 『한중록』의 집필 의도도 알게 된다. 『한중록』은 정조의 즉위와 동시에 사도세자 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몰락한 친정을 복권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쓴 자기변명서다. 『한중록』의 사료적 가치를 『영조실록』을 비롯한 다른 여러 사료와 비교 검토한 후 제한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도세자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당파 구조를 상수(常數)로 놓고, 나머지 요인을 변수(變數)로 대입해 분석해야 한다. 그 원인(遠因)은 노론과 영조가 관련된 경종 독살설이고, 근인(近因)은 영조 31년(1755)의 나주벽서사건 및 토역경과사건이다. 또한 영조가 재위 35년(1759) 예순여섯의 나이로 열다섯의 정순왕후와 재혼한 것도 주요 원인의 하나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자신의 친정과 관련 없는 대목에서는 뛰어난 직관으로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사도세자와 경종의 만남을 서술한 대목이다. 경종은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11년 전에 사망했으므로 직접 만날 수는 없었다. 사도세자는 영조 11년(1735) 1월 21일 영빈(暎嬪) 이씨에게서 태어나는데 『영조실록』은 “이때 나라에 오랫동안 저사(儲嗣: 왕의 후계자)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다가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 45년(1719) 정빈(靖嬪) 이씨가 낳은 효장세자가 영조 4년(1728) 세상을 떠난 후 만 41세 때 다시 아들을 본 것이다. 늦둥이는 이듬해 3월 만 1세의 어린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영조실록』 13년(1737) 2월조는 “세자의 나이 세 살인데 행동거지가 의연했으며…『효경(孝經)』을 펴고 문왕(文王)이란 글자를 낭랑하게 송독(誦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최초 일인즉 섧고 애달픈 것이 하나는 어리신 아기(사도세자)를 저승전(儲承殿)에 멀리 두심이요, 둘은 괴이한 내인(內人) 들여오신 연고”라고 한탄했다. 저승전은 경종의 부인 선의왕후가 살던 전각이었다. 연잉군 대신 양자를 들여 경종의 후사로 삼으려던 어씨는 경종 급서 후 쓸쓸히 지내다가 영조 6년(1730) 만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혜경궁 홍씨가 말하는 ‘괴이한 내인’이란 경종과 왕비 어씨를 모시던 궁녀들을 뜻한다.

“어대비 국휼 삼 년 후 어대비 부리시던 내인들이 다 밖으로 나갔더니… 어찌 하오신 성의(聖意)신지 경묘(景廟: 경종)와 어대비전 내인 나간 것을 최 상궁 이하로 다 불러들여 원자궁(元子宮) 내인을 만드시니 처소 내인들 모양이 경묘(景廟) 계신 듯 싶을 것이요.(『한중록』)”

경종과 어씨를 모셨던 궁녀들이 어린 사도세자를 모신 것이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반(反)노론의 정견을 갖게 된 계기를 설명하는 셈이다. 그러나 어린 사도세자를 경종 때의 사건으로 끌어들인 것은 경종의 궁녀들만이 아니었다.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세자가 만 4세 때인 재위 15년(1739) 1월 영조는 느닷없이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선위(禪位)하겠다고 선언했다.

“황형(皇兄: 경종)의 후사를 시켜 우리 집을 삼가 지키게 하는 것이 내 본심인데, 열조(列祖)께서 도우시어 다행히 원량(元良: 세자)이 이제는 다섯 살에 차서 이미 주창(主<9B2F>: 후사)이 있다. 아! 효장(孝章)세자가 살아 있다면 어찌 오늘까지 기다리겠는가?(『영조실록』 15년 1월 11일)”

만 4세 아이에게 선위하겠다는 선언이 영조의 본심이 아니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자는 석고대죄해야 했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를 필두로 백관도 전(殿)에서 내려가 관(冠)을 벗고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명(命)의 환수를 요청해야 했다. 그제야 영조는 “위로 자성(慈聖: 대비)을 근심시키고 아래로 원량(元良: 세자)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명을 거두었다. 영조는 “삼종(三宗)의 혈맥은 황형과 나뿐이었다”며 자신의 즉위가 순리였다고 강조했으나 경종 편에 섰던 소론 강경파를 탄압했다. 말로는 경종과 한 몸이었음을 강조하면서도 행동으로는 경종의 충신들을 사형시키는 혼란 속에 어린 세자를 끌어들인 인물이 영조였다.

영조는 세자를 만 9세 때 동갑내기 혜경궁 홍씨와 혼인시켰는데 부친 홍봉한(洪鳳漢)은 그때 매번 과거에 떨어지던 낙방거사였다. 음보(蔭補)로 능참봉이 되었던 그는 자신의 딸이 세자빈이 된 지 9개월 만인 영조 20년(1744) 10월 과거에 급제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장인(丈人)이 과거하시다”면서 좋아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정성왕후께서는… 노론을 위하시기를 친척같이 하시기에 우리 집에 가례(嘉禮)한 일을 심히 흔희(欣喜)하시다가 (부친이) 대천(大闡: 과거급제)하신 일을 진실로 기꺼하셔서 안수(眼水: 눈물)까지 머금으시니”라고 덧붙였다. 사돈 홍봉한이 노론이기 때문에 가례도, 급제도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론이기 때문에 홍봉한은 소론의 견해를 갖게 된 사위와 척을 지게 된다. 세자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열다섯 살 때인 영조 25년(1749)이었다. 그해 1월 22일 영조는 밤에 승정원에 봉서(封書)를 내렸다. 첫머리에 ‘중옹(仲雍)’ 등의 글자가 있고 하단에는 ‘을유 등록(乙酉謄錄)’이란 구절이 있었다.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둘째 아들 중옹은 막내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형인 태백(泰白)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도망친 인물이다. 을유년은 숙종이 세자에게 선위하겠다고 소동을 피운 재위 31년(1705)을 뜻한다.

“내가 감히 삼종 혈맥의 하교를 어기지 못해서 비록 이 자리에 있었지만 남면(南面: 임금의 자리)을 즐겨 하지 않은 마음은 25년이 하루 같아서 날마다 원량(元良)이 나이 들기만 기다렸는데 이제 다행히 열다섯 살이 되었다. 오늘 이 거조는 하나는 저승에 가 황형(皇兄: 경종)의 얼굴을 뵙고자 함이요, 하나는 남면을 즐겨 하지 않는 마음을 성취하고자 함이다.(『영조실록』 25년 1월 22일)”

이튿날 비가 몹시 내리는 가운데 소동이 벌어졌다. 세자는 백관들과 빗줄기 속에서 울면서 명의 환수를 요청했다. 영조는 한참 후에 “대리청정(代理聽政)은 어떻겠는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린 세자로 하여금 막연히 국사(國事)를 모르게 했다가 뒷날 만약 노론과 소론에 의해 그릇된다면 내가 비록 알더라도 어찌 능히 살아와서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오늘 이 거조는 뒷날에 반드시 효험이 없지 않을 것이다.(『영조실록』 25년 1월 23일)”

그해 1월 27일 영조는 세자의 대리청정을 태묘(太廟: 종묘)에 고하고 팔도에 전교를 반포했다. 영조는 숙종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시킨 것을 언급하면서 “30년 동안 이 자리를 벗어나려 고심했으나 저궁(儲宮: 세자)이 울면서 간곡히 만류해 대리청정으로 양보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사도세자는 열다섯의 나이에 정국의 한복판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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