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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방송 준비 중 전달된 메모지 ‘내일 통합KBS 축하방송 진행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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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30년 전 TBC의 마지막을 회상하는 방송인 허참씨. 8년간 TBC맨으로 살았던 허씨는 1980년 12월 1일부터는 KBS로 적을 옮겨야 했다. 그는 통폐합 다음 날 KBS 별관에 모여 이동하던 TBC 직원들의 모습이 꼭 난민 같았다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1980년 11월 30일 서른한 살의 방송인 허참씨는 ‘TBC 고별방송’을 진행하는 마이크를 잡았다. 신군부의 방송 통폐합 정책에 따라 동양방송(TBC TV·라디오)이 강제로 문을 닫게 된 날이었다. 72년 TBC 라디오 ‘7대 가수 쇼’로 TV방송 MC 일을 시작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쇼쇼쇼’ 진행에 이르기까지 ‘TBC맨’으로 살았던 8년 세월이 허씨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강제 통폐합 소식으로 착 가라앉은 동양방송국의 눅눅한 분위기는 고별방송에서 가수들의 울먹이는 노래 소리로 이어졌다. 그날, 방송을 준비하던 허씨의 손에 메모지 한 장이 전달됐다. ‘내일(12월 1일) 통합 KBS 방송의 출범을 축하하는 방송을 진행해야 함. 통합 축하 노래를 연습해서 올 것’.

TBC가 문을 닫는 고별방송을 하느라 동료 연예인들이 울먹이는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이 메모지의 건조한 문구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8년간 몸담은 TBC가 강제 통합된 바로 다음 날 통합 KBS의 출범을 축하하는 행사를 진행해야 하는 마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허씨는 30년의 세월이 흘러 회갑을 넘긴 지금도 당시의 복잡한 심경이 잊혀지지 않는 듯했다.

“TBC의 문을 닫는 방송을 진행하고 바로 다음 날 방송 통폐합 축하 방송을 진행하라고 하니 마음이 착잡했죠.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요.”

TBC 프로그램 ‘쇼쇼쇼’의 진행자 허참(왼쪽)씨와 정소녀씨. [중앙포토]

허씨는 당시 TBC를 통해 성장한 방송인이었다. 75년부터 TBC 간판 예능 프로그램인 ‘쇼쇼쇼’를 진행하면서 일약 국민 MC로 떠올랐다. 쇼쇼쇼는 국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효시였다. 국내 방송 최초로 미주 녹화 방송을 진행했을 정도로 기술과 구성 면에서 다른 방송들을 압도했다.

-연예인들에게 TBC는 어떤 방송이었나.
“TBC가 새롭게 선보인 게 많았어요. 출연 연예인들을 위해 분장실과 대기실을 만들어준 것도 TBC가 처음이었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 있어선 독보적이란 평가가 많았어요. 17년간 전 직원들이 열정을 쏟아부은 결과라고 봐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강제로 통합된다고 하니 직원들 심정이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방송 통폐합 때 얘기를 해주시죠.
“TBC 방송국 내 침울한 분위기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문을 닫기 두어 달 전부터 ‘TBC가 없어진다’는 소문이 떠돌았어요. 퇴근 후 삼삼오오 술잔을 기울이는 직원들이 늘어나고, 방송국 복도마다 폐기될 녹음 테이프가 쌓이기 시작했지요. 통폐합 소식이 전해지자 직원들이 방송국 주변에서 분통을 터뜨리며 술을 마시는 풍경이 일상화됐지요. 10년, 20년 몸 바쳐 일하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거잖아요.”

방송 통폐합 첫날, TBC맨들은 여의도 사옥(현 KBS 별관)에 집결했다고 한다. 졸지에 동양방송에서 한국방송(KBS)으로 옷을 갈아입게 된 직원들은 KBS 본사에서 나온 직원을 따라 KBS 본관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당시 그 대열에 끼었던 어떤 PD가 허씨에게 이렇게 전해줬다고 한다. “꼭 난민들이 어딘가 끌려가는 풍경처럼 보였어요. 나중에 이 장면을 기록으로 남겨야겠어요.”

허씨는 통폐합 직후 KBS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후 ‘가족오락관’으로 대표되는 그의 방송 인생사는 대부분 KBS에서 채워졌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TV 진행을 익혔던 TBC 시절이 문득문득 그리웠던 게 사실”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잊지 못할 일화 한 토막.

“고별방송을 진행한 다음 날 여의도 TBC 사옥의 간판이 KBS로 바뀌었더군요. 그런데 주차장에서 차를 빼는데 맨홀 뚜껑엔 ‘TBC’가 그대로 새겨져 있더라고요. 맨홀 뚜껑까진 차마 신경 쓰지 못했구나 싶었죠.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통폐합 뒤 방송 사정은 어떻습니까.
“통폐합 이후 방송국들이 비정상적으로 덩치만 키워온 측면이 있습니다. 하루빨리 원래 상태로 돌아가 제대로 된 경쟁이 가능한 방송 풍토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동양방송 TBC가 다시 문을 연다면.
“글쎄요, 고별 방송 때 차마 흘릴 수 없었던 눈물이 그날은 주룩주룩 흐르지 않을까요?”

정강현 기자 fon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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