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30년 전 TBC의 마지막을 회상하는 방송인 허참씨. 8년간 TBC맨으로 살았던 허씨는 1980년 12월 1일부터는 KBS로 적을 옮겨야 했다. 그는 통폐합 다음 날 KBS 별관에 모여 이동하던 TBC 직원들의 모습이 꼭 난민 같았다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강제 통폐합 소식으로 착 가라앉은 동양방송국의 눅눅한 분위기는 고별방송에서 가수들의 울먹이는 노래 소리로 이어졌다. 그날, 방송을 준비하던 허씨의 손에 메모지 한 장이 전달됐다. ‘내일(12월 1일) 통합 KBS 방송의 출범을 축하하는 방송을 진행해야 함. 통합 축하 노래를 연습해서 올 것’.
TBC가 문을 닫는 고별방송을 하느라 동료 연예인들이 울먹이는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이 메모지의 건조한 문구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8년간 몸담은 TBC가 강제 통합된 바로 다음 날 통합 KBS의 출범을 축하하는 행사를 진행해야 하는 마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허씨는 30년의 세월이 흘러 회갑을 넘긴 지금도 당시의 복잡한 심경이 잊혀지지 않는 듯했다.
“TBC의 문을 닫는 방송을 진행하고 바로 다음 날 방송 통폐합 축하 방송을 진행하라고 하니 마음이 착잡했죠.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요.”
TBC 프로그램 ‘쇼쇼쇼’의 진행자 허참(왼쪽)씨와 정소녀씨. [중앙포토]
-연예인들에게 TBC는 어떤 방송이었나.
“TBC가 새롭게 선보인 게 많았어요. 출연 연예인들을 위해 분장실과 대기실을 만들어준 것도 TBC가 처음이었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 있어선 독보적이란 평가가 많았어요. 17년간 전 직원들이 열정을 쏟아부은 결과라고 봐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강제로 통합된다고 하니 직원들 심정이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방송 통폐합 때 얘기를 해주시죠.
“TBC 방송국 내 침울한 분위기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문을 닫기 두어 달 전부터 ‘TBC가 없어진다’는 소문이 떠돌았어요. 퇴근 후 삼삼오오 술잔을 기울이는 직원들이 늘어나고, 방송국 복도마다 폐기될 녹음 테이프가 쌓이기 시작했지요. 통폐합 소식이 전해지자 직원들이 방송국 주변에서 분통을 터뜨리며 술을 마시는 풍경이 일상화됐지요. 10년, 20년 몸 바쳐 일하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거잖아요.”
방송 통폐합 첫날, TBC맨들은 여의도 사옥(현 KBS 별관)에 집결했다고 한다. 졸지에 동양방송에서 한국방송(KBS)으로 옷을 갈아입게 된 직원들은 KBS 본사에서 나온 직원을 따라 KBS 본관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당시 그 대열에 끼었던 어떤 PD가 허씨에게 이렇게 전해줬다고 한다. “꼭 난민들이 어딘가 끌려가는 풍경처럼 보였어요. 나중에 이 장면을 기록으로 남겨야겠어요.”
허씨는 통폐합 직후 KBS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후 ‘가족오락관’으로 대표되는 그의 방송 인생사는 대부분 KBS에서 채워졌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TV 진행을 익혔던 TBC 시절이 문득문득 그리웠던 게 사실”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잊지 못할 일화 한 토막.
“고별방송을 진행한 다음 날 여의도 TBC 사옥의 간판이 KBS로 바뀌었더군요. 그런데 주차장에서 차를 빼는데 맨홀 뚜껑엔 ‘TBC’가 그대로 새겨져 있더라고요. 맨홀 뚜껑까진 차마 신경 쓰지 못했구나 싶었죠.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통폐합 뒤 방송 사정은 어떻습니까.
“통폐합 이후 방송국들이 비정상적으로 덩치만 키워온 측면이 있습니다. 하루빨리 원래 상태로 돌아가 제대로 된 경쟁이 가능한 방송 풍토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동양방송 TBC가 다시 문을 연다면.
“글쎄요, 고별 방송 때 차마 흘릴 수 없었던 눈물이 그날은 주룩주룩 흐르지 않을까요?”
정강현 기자 fone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