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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이산상봉] "열아홉 네가 백발이 됐구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어머니, 건강은 어떠세요. "

"너도 나이 많고 나도 나이 많은데 이 정도면 건강한 거지…. "

8순 노모와 초로(初老)의 아들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고는 누가 떼놓을세라 부둥켜 안았다. 아들의 왼쪽 팔이 의수(義手)라는 사실을 알아챈 노모가 또 다시 오열했다.

"불쌍하다… 불쌍해. 어쩌다 이렇게 됐누. "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 아들은 6.25때 영천전투에서 팔을 잃었다고 했다.

"다 내 잘못이지. 내가 죄를 많이 지어 그런 거지…. " 어머니는 "이제 집으로 가자" 며 아들의 팔을 잡아끌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또 한번 아프게 했다.

북한 최고의 과학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 趙주경(68)씨. 오매불망(寤寐不忘) 그 아들을 그리며 평생을 한(恨)속에 살아온 어머니 申재순(88.부산시 서구 서대신동)씨. 15일 모자상봉은 그렇게 이뤄졌다.

趙씨는 서울대 문리대에 다니다 열아홉 나이로 인민군에 강제 징집돼 전쟁터로 끌려갔다. 종전후 趙씨는 북한에서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 23세부터 교단에 서기 시작하면서 과학자의 길을 걸었다.

80여건의 과학논문을 발표하고 '해석수학' 등 50여권의 교과서.참고서를 집필했다고 한다.현재는 김일성대학의 부총장급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33년 남편과 사별한 申씨에게 외아들인 趙씨는 인생의 전부였다. 밖에서 '애비 없는 자식이라 버릇없다' 는 입방아를 들을까봐 항상 엄하게 대했다. 이 점이 어머니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고 한다.

"애틋하게 사랑 표현 한 번만이라도 해봤더라면…. " 申씨는 목숨과도 같은 아들과 헤어진 후 친정이 사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행상 등 궂은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20여년 전 절로 들어간 申씨는 '살아서 아들을 만나야 한다' 는 일념에 이제껏 불공을 드려왔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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