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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문화기상도 <2> 연극·뮤지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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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2010년 연극·뮤지컬계는 유독 해외 명작 공연이 많다.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는 공연을 국내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건 반가운 일. 무엇보다 구태의연하거나 뻔한 영웅담이 아닌, 못된 듯 하지만 인간적이거나, 엉뚱하지만 찡한 감동을 주는 등장인물들이 눈길을 잡는다. 올해 무대에 오를 주요 화제작의 주인공을 통해 2010년 연극·뮤지컬의 판세를 짚어본다.

 최민우 기자

◆허망한 권력자, 체코 전 총리 빌렘

빌리는 역경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사진은 2005년 ‘빌리 엘리어트’ 영국 초연 당시 주연 리암 모우어. [매지스텔라 제공]

빌렘 리에게르. 그는 체코의 전직 총리였다. 권력의 최정점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건만, 현재의 그는 초라하다. 벚꽃나무에 둘러싸인 아담한 관저에서 나가 달라는 통보가 전해진다. 그것도 공식적인 루트가 아니다. 은퇴한 전 총리를 인터뷰하러 온 기자를 통해서다. 하나뿐인 딸은 재산을 관리해 주겠다며 그를 꼬드기더니, 명의를 바꾸곤 입을 싹 다문다. 와중에 그는 젊은 여성 정치학도와 정분이 난다. 스캔들, 권력의 압력, 가족의 배신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그가 현 정권으로부터 자문위원을 맡아달라는, 회유를 받는다. 그의 정치적 선택은 무엇일까.

이 연극을 쓴 작가가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이다. 최고 통치자가 권력에서 물러난 후 희곡을 집필했다는 건, 우리로선 낯설면서도 신선한 그림이다. 내용 또한 흥미진진하다. 숨기고픈 여성 편력, 권력의 끝자락이라도 움켜쥐고 싶은 안간힘 등이 적나라하다. 하벨은 “내 경험이 아닌, 허구의 얘기”라며 시치미를 떼지만 관객은 주인공에서 하벨의 그림자를 본다. 최고의 연극은 포장되지 않은, 솔직한 내면에서 비롯됨을 작품은 증명한다.

▶연극 ‘리빙’(Leaving)=4월2∼4일, LG아트센터

◆베로니카의 뒤틀린 콤플렉스

중학생 남자 아이끼리 치고 받고 싸운다. 그 나이 때 그럴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예상보다 싸움은 후유증이 크다. 한 아이가 휘두른 몽둥이에 다른 한 명의 치아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때린 애의 부모가 맞은 애 부모를 찾아가 사과한다. 때린 애의 아버지는 변호사이며 상류층에 속한다. 반면 맞은 애의 아버지는 그저 그런 자영업자이고, 어머니는 글을 쓴다고 폼은 잡지만 썩 내세울만한 작품은 없는, 중산층이다. 양 부모의 만남은 처음엔 고상했다. 아프리카의 분쟁 등을 거론하는 식이다. 근데 얘기가 흘러갈수록 정중한 사과는 엉뚱한 데로 빠진다. 급기야 양측 엄마끼리 머리카락까지 잡고 늘어진다.

제목에 큰 의미부여를 하지 말 것. ‘대학살의 신’을 떠올리며 극한대에 몰린, 처절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할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상적이며 남루하다. 특히 베로니카란 이름의 맞은 애 엄마는, 겉으론 돈에 무관심하고 속물을 무시하며 지적인 자신감이 충만해 보이지만 결정적 순간엔 자신의 밑바닥을 그대로 드러낸다. 한국 중산층의 허위 의식이 오버랩되는 인물이다. 지난해 토니상 연극 부문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핫(hot) 한 작품이다.

▶연극 ‘대학살의 신’(God of Carnage)=4월5일∼5월5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꿈을 찾는 소년 발레리노

영국 북부의 작은 마을. 열한살의 소년 빌리는 이 가난한 탄광촌에서 파업 시위에 열성인 아버지와 형, 그리고 치매증세가 있는 할머니와 살고 있다. 엄마는 없다.

권투 연습을 하던 빌리는 체육관 한 귀퉁이에서 진행되던 발레 수업을 몰래 훔쳐 보곤 마음을 뺏긴다. 그러나 검게 그을린 소년이 우아한 발레복을 입기엔 현실의 벽은 너무 높다. 쓸쓸한 성탄절, 혼자 체육관에 남겨진 빌리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을 안타까워하며 마지막 점핑을 한다. 환영처럼 나타난 10년 뒤의 ‘성인 빌리’와 함께.

코끝을 찡하게 하는 스토리와 하늘 높이 나는 플라잉이 인상 깊은 ‘빌리 엘리어트’는 올해 최고 기대작이다. 작품 속 꿈을 찾기 위해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소년 발레리노처럼, ‘한국의 빌리’를 발굴하는 과정 역시 까다로웠다. 지난해 2월부터 1년여에 걸쳐 총 세 차례의 오디션이 진행됐다. 9세∼12세의 700여명 남자 아이들이 지원했고, 현재는 7명으로 추려졌다. 최종 4명 안에 들기 위한 피 말리는 경합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8월초∼2011년 2월, LG아트센터

◆엉뚱황당한 아서왕

우리가 아는 ‘아서왕의 전설’은 잊어버릴 것. 무진장 웃기다. 마구 비튼다. 아서왕은 우선 카리스마와 거리가 멀다. 의지는 강하지만 머리가 나쁘다. 돈키호테를 연상시킬 정도다. 거룩한 성배를 찾기 위해 나서는 데 동참하는 이들은 앞 뒤 안 가리는 랜슬롯경, 겁 많은 로빈경, 방구쟁이 등 5명 원탁의 기사다.

모험 길은 좌충우돌의 연속이다. 기사들은 쇼걸과 도박에 빠져 허우적대고, 무턱대고 용맹하던 랜슬롯경은 게이 왕자를 도와주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뒤늦게 알게 된다. 마녀의 점괘를 따라 동굴에 들어가선 식인 토끼에 가슴을 쓸어 내린다. 객석에선 웃음이 빵빵 터진다. 원작을 기막히게 패러디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권위란 틀에 갇혀 저 높이 있던 아서왕이 조금은 덜 떨어져도 누구나 고개를 끄떡이게 만드는 평범한 인물로 변신해 ‘우리’앞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대중이 원하는 현대판 영웅은 무엇보다 ‘소통’과 ‘공감’에서 비롯된다는 걸 슬쩍 내비친다.

▶뮤지컬 ‘스팸어랏’(Spamalot)=9월28일∼2011년 1월2일, 한전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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