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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팔의 유언 “아들아, 난 세상이 심심해서 죽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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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서울 중구 청계천 7가 변에 자리 잡은 장소팔 선생 동상. 지난해 12월 28일 제막식이 열렸다. 조강수 기자

2002년 4월 21일. 서울 반포동 한 아파트에서 와병 중인 80대 아버지 옆에 50대 아들이 앉았다.
“아들아, 내가 이제 가야겠다. 근데 너 내가 왜 죽는지 아느냐?”
“아니 아버지. 금방 회복되실 텐데 어찌 그런 말씀을… 돌아가신다면 몸이 아프셔서.”
“아니다. 심심해서 죽는다. 너도 늙어봐라. 늙으면 진짜 할 일도 없고 심심해 죽겠다. 그래서 세상을 뜨는 거야.(더 재밌는 게 없나 하고)”

다음 날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다. 그제야 아들은 그게 마지막 유언이었음을 깨달았다. 국민 만담가 고 장소팔(1922~2002) 선생, 그는 유언도 만담(漫談)처럼 남기고 떠났다. 그의 이름 역시 만담 소재였다. 만담가로 데뷔하면서부터 쓴 장소팔이라는 예명은 ‘어머니가 장에 소 팔러 갔다가 낳았다’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타고난 만담꾼인 그는 한국전쟁 이후 암울했던 시절, 입담 하나로 서민들을 울리고 웃겼다. 그의 본명은 세상을 세운다는 뜻의 장세건(張世建). 이름대로 그는 80평생 만담으로 세상에 웃음을 전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기독교든 불교든 종교에 귀의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다 속 좁은 분들이 아니야’라고 하시더군요. 보통 만담하시는 분들이 바깥에서 공연할 때만 재밌다고들 하는데 아버지는 집에서도 항상 재미가 있으셨어요. 생활 자체가 재미난, 재미에 살고 재미에 죽는 그런 분이셨어요.”
장소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만담 부활 운동을 벌이고 있는 차남 장광혁(57·장소팔기념사업회 이사장)씨의 말이다.

타고난 입담으로 서민 애환 달래

장소팔·고춘자의 음반인 ‘민요만담’ 표지.

지난해 12월 28일 오후 4시. 서울 중구 흥인동 162-1번지 청계천 7가 옆길에 7년 전 작고한 장소팔 선생이 다시 등장했다. 벤치에 앉은 채 오른손을 들어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친근한 할아버지. 생전 그대로의 모습을 본떠 만든 청동 조각상이다. 장소팔 선생은 서울 인사동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신당동으로 이사했다. 이후 황학동·신당동 등 중구 일대에서 어린 시절과 만담가로서 성공한 뒤 전성기를 보냈다. 1925년부터 72년까지다. 그래서 서울 중구청이 동상 건립 자금을 댔다.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자인 최영섭씨가 동상 비문의 글을 쓰고 ‘소리꾼’ 장사익씨는 글씨를 썼다. 동상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원로 방송인 송해(82)씨는 “소팔이 형은 술친구이자 의형제같이 지냈다”며 “그의 만담 인생은 단조로웠던 시대에 웃음과 희망을 줬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만담에 대해선 “해학·풍류·익살이 넘치는 예술이었다”고 평가했다.

장소팔 선생은 초등학교 학예회 때 서유기의 ‘손오공’ 역할을 했다. 이를 지켜본 유명 만담가의 눈에 띄어 일본에서 만담을 배울 기회를 얻었다. 일제시대 때 만담이라는 장르를 창시, 최고의 만담가로 활동했던 신불출씨도 그의 스승이다. 연극배우이자 극작가이던 신씨는 만담을 통해 우회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해학과 풍자로 정치적 발언을 시도했다. 그가 1933년 출반한 ‘익살 맞은 대머리’라는 만담 음반은 대히트했다. 신씨의 뒤를 이은 장소팔 선생은 1946년 KBS의 전신인 경성방송국을 통해 공식 데뷔했다. 당시 ‘민요만담’을 처음 선보였다. ‘천안삼거리’ ‘양산도’ 등 8도 민요를 명창들이 부르면 이를 모티브로 만담을 이어가는 형식이었다.

“민요에 스토리텔링을 결합한 거죠. 한국판 오페라라고 할까. 당시 KBS 라디오에서 ‘8도 민요만담 시간이 돌아왔습니다’는 멘트가 나오면 청취자들이 열광했대요. 그때 아버지 공연에서 민요를 불렀던 김옥심·이은주·목계월씨 등이 지금은 다 인간문화재가 됐고 그중 막내가 안숙선 명창입니다. 이것이 ‘내 강산 좋을시고’라는 명승고적 탐방 프로그램으로 이어져 60년대 말까지 계속됐고요.”

장광혁 이사장의 얘기다. 그는 “팍팍했던 그 시절엔 만담이 유일한 오락거리였다”며 “요즘 대중가요처럼 만담이 LP 음반으로 녹음돼 인기 리에 팔렸다”고 했다. 만담 소재는 대부분 소시민의 소박한 하루, 신혼부부의 작은 소망 등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의 애환이었다. 장소팔 선생이 고춘자씨를 만난 건 1954년 군 위문공연 때. 가수 지망생이었던 고춘자(95년 작고)씨는 해방 이후 서울에서 악극단 활동을 하고 있었다. 어수룩하면서도 엉뚱한 장소팔과 서글서글한 눈매에 쉰 목소리의 고춘자. 장·고 콤비가 쏟아내는 속사포식 만담에 전후 생활이 고단했던 서민들은 잠시나마 시름을 잊곤 했다.

앨범 ‘장소팔·고춘자의 흥겨운 민요만담 걸작집(72년)’에 나오는 ‘여학생이 해산했네’라는 만담. 김옥심·이은주 명창이 부르는 천안삼거리가 끝나고 장소팔·고춘자가 등장한다.

(장)“>얘! 그 색시들 흥타령 하는 걸 들어보니 내가, 생각이 난다!”
(고)“무슨 생각요?”
(장)“내가, 지난번, 유랑 여행 떠났다가, 천안 정거장에 들렀구나!”
(고)“니예에!”
(장)“천안 정거장 넓은 마당에, 사람들이 와글와글해!”
(고):“아, 그야 차표 사러 나왔겠지요!”
(장)“아니더라! 사건이 벌어졌어요!”
(고)“무슨 사건이야요?”
(장)“굉장한 사건이야? 이 거리 저 거리, 천안 정거장의 넓은 마당에서 여학생이 해산을 했단다!”
(고)“어머나! 여학생이 해산을 했어요?”
(중략)
(고)“아이고, 망측스러워라!”
(장)“뭐가 망측스러우냐?”
(고)“아니! 그럼 길거리에서 여학생이 해산을 했는데도 안 망측스러워요?”
(장)“얘가, 뭐, 여학생이 해산을 했다니까, 뭐 아이를 낳은 줄 아나?”
(고)“그럼? 뭐예요?”
(장)“여학생이 선생님 모시고 멀리 소풍을 갔다 와서 천안 정거장에서 집으로 모두 해산했단다!”

제2의 장소팔·고춘자 나와야

장광혁 이사장(왼쪽)과 안춘자씨가 마이크 앞에서 만담 연습을 하는 장면. [장광혁씨 제공]

“아버지가 보름 정도 지방공연 갔다 오면 동네 잔치가 벌어지곤 했어요. 구봉서·송해·이은관(배뱅이굿 소리 무형문화재) 선생이 자주 왔어요. 고 서영춘씨가 막내였고요. 하룻밤에 맥주가 몇 리어카씩 동이 났어요. 사정이 어려운 친구나 동료가 있으면 리어카나 자전거를 사 줬어요. 그것 갖고 먹고 살 수 있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러나 70년대 들어 TV가 보급되면서 만담은 사양길에 들어섰다. 쓰러지고 자빠지는 코미디에 자리를 내줬다. 특히 흑백에서 컬러TV가 등장하면서는 지방공연마저 끊겼다. 당시 청중은 재즈, 찰리 박의 비빠빠룰라, 트위스트 등의 화려한 쇼 공연장으로 몰려갔다. 장소팔 선생은 사라져가는 만담을 지키기 위해 96년 ‘만담보존회’를 창립, 2001년까지 회장을 맡기도 했다.

만담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예능프로 ‘패밀리가 떴다’의 ‘유재석·대성’ 콤비, 박영진·박성광의 개그 ‘박대박2’에는 ‘장소팔·고춘자 식’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개그맨 강성범은 만담을 개그 소재로 자주 활용한다.

장소팔 선생이 못 이룬 꿈은 차남인 장 이사장이 잇고 있다. 출판사를 운영했던 장 이사장의 직업은 유머 컨설턴트다. 유머를 학문적으로 연구해 심리 상담 및 치료에 활용하는 기법을 연구 중이다. 조만간 유머상담심리학에 관한 책을 낼 계획이다. 몇 년간 헤맨 끝에 지난해 8월 그는 만담 파트너를 찾았다. ‘개그콘서트’ 출신 개그우먼인 안춘자(42)씨다. 쉰 목소리에 빠른 말솜씨가 고춘자씨 판박이다. 과거 장소팔·고춘자 콤비를 재현할 자신감을 얻었다. 두 사람은 지난해 10월 추석 때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아시아의 한가위 축제’ 행사 때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 만담을 선보였고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 12월 29일 서초동에서 만난 두 사람은 기자의 요청을 받고 즉석에서 만담을 했다.

(안)“선생님, 연말인데 덕담 한마디해 주신다면?”
(장)“연말에 가장 중요한 건 선물하고 뇌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안)“그걸 어떻게 구분하죠?”
(장)“선물은 마음이 내켜서 선뜻 주는 것이고 뇌물은 뭐 득 되는 게 없을까 뇌를 굴려서 주는 겁니다. 아셨죠?”
(안)“선물을 줄 때는 양손은 무겁게, 마음은 가볍게 주십시오.”

장 이사장은 올해 한글학회와 공동으로 표준말을 사용한 전국 만담경연대회를 열 작정이다. 만담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후학을 발굴, 양성하기 위해서다. 장소팔 선생 동상 제막에 대해 그는 “만담 부활의 선언적 의미가 크다”고 했다. 이어 “만담을 되살려 세대 간, 이해집단 간 불통의 벽을 허무는 게 내 목표다. 컴퓨터 등 기술의 발전으로 심화된 세대 간 언어의 단절은 심각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장 이사장은 돈 안 되는(?) 일이란 일에는 두루 개입해 있다. 22년째 복지재단 이사직을 맡아 오면서 용산 쪽방촌 상담실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한편 독도 알리기 오페라 제작을 추진 중이다.

일본·중국에선 만담 인기 여전
일본의 만담은 ‘만자이(漫才)’로 불린다. 에도시대부터 오사카 지방에서 발달했다. 보통 바보 역인 ‘보케’와 보통 사람 역인 ‘쓰코미’가 짝을 이뤄 공연한다. 2인1조다. 궁중과 절, 귀족과 무사 집안에서 정월을 축하하던 말에서 출발해 서민가정으로도 퍼졌다. 20세기 초부터 인기를 얻었다. 1934년 게이오(慶應)대와 와세다(早稻田)대의 야구경기였던 ‘조경전’의 라디오 중계방송은 선풍적 인기를 끈 만자이였다. 야구를 보지 않는 사람도 조경전의 팬이 됐다고 한다. 지금도 만자이 콩쿠르에는 수많은 젊은이가 지원하며 아이돌 가수도 만자이를 한다. 도쿄를 중심으로 유행한 ‘라쿠고(落語)’라는 1인 만담도 유명하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 역할을 하며 익살스러운 대화로 이끌어 간다. 일본 만담은 TV가 등장한 후 오히려 전국에 방송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중국 만담은 ‘샹성(相聲)’으로 불린다. 19세기 후반 베이징에서 생겨났다. 혼성 만담인 우리와 달리 남성 2명이 엮어내는 동성만담이 주류다. 이야기·노래·춤으로 이뤄지고 사회풍자와 해학성이 풍부하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정치적 풍자는 사라졌으나 문화대혁명 후 ‘마오쩌둥어록’을 읽던 습관을 풍자한 ‘여차조상’이나 정치적 딱지 붙이기를 풍자한 ‘모자공창’이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TV로 방영될 만큼 인기가 많다. 한편 북한에서도 전통적 형태의 만담이 인기 리에 공연되고 있다고 한다.

소리꾼 장사익씨는 “장소팔 선생의 만담은 은유와 비유로 서민 정서를 어루만져준 진짜 유머였다”며 “일본 사회가 원로 만담가를 존경하고 대우해 주는 이유를 되새겨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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