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백남준 지상감상] 1. 야곱의 사다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서울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에서 21일부터 열리고 있는 '백남준의 세계' 전(10월29일까지)지상 감상 시리즈를 시작한다.

'전자예술의 미켈란젤로' 로 꼽히는 백남준의 대표적 작품들을 전문가 기고로 매주 1회씩 싣는다.

'야곱의 사다리' 는 백남준의 사상과 미학이 집약된 최근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높이 8m의 분수에 레이저 광선을 투영하여 만든 이 레이저 사다리는 미술관 천정을 장식한 '레이저 천정화' , 바닥의 멀티모니터 비디오 작업과 함께 '동시적 변조' 라는 환경 설치작업을 구성한다.

'천지인(天地人)' 사상에 입각하여 태극무늬 등으로 우주원리를 도상화 시킨 천정화가 하늘이고, 화사한 이미지를 방영하는 비디오 설치가 땅이라면, 지그재그형의 '야곱의 사다리' 는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인간을 표상한다.

바닥의 비디오 설치가 20세기 비디오 거장 백남준의 업적을 회고시켜주는 한편, 고도의 기술과 자본이 투여된 레이저 천정화와 사다리는 백남준의 21세기 비전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새로운 매체와 기술을 탐구, 실험하는 작가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실감케 한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자신의 작업 영역을 확장시키고 새로운 표현 언어를 창출하는 백남준. 그에게 레이저 광선은 텔레비전과 비디오 이후의 '포스트비디오'를 준비시킨다.

그의 레이저 작업은 전자매체에 이은 광매체 예술의 개막을 예고하지만 실상 백남준은 이미 오래 전부터 대안매체로서 레이저 광선의 활용을 시험해 왔다.

1965년의 수필 '유토피안 레이저 스테이션' 에서 고주파 레이저의 잠재력을 예언한 이래 1982년 휘트니 미술관 개인전에서는 머스 커닝햄의 댄스 이미지를 레이저로 공중에 띄웠고 1995년 광주 비엔날레에서는 레이저 광채의 바로크적 현란함을 과시하였다.

백남준은 기술을 능가하기 위하여 기술을 사용하고 기술의 인간화를 위하여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이번에 야곱의 꿈을 도상화 한 '야곱의 사다리' 는 인간의 천국에 이르려는 욕망과 좌절을 은유하는 듯 하다.

월남전의 환각제 인체실험을 고발한 동제목의 영화 마지막에 팀 로빈스가 죽은 아들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밟으며 하늘로 올라가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구약의 야곱은 천사의 손을 잡고, 영화 속의 야곱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천국에 이르듯이, 백남준은 레이저 빛을 따라 예술이라는 자신의 왕국에 입성하려는 것이다.

말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노대가의 실존적 사색을 반영하는 듯한 '야곱의 사다리' .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 백남준은 '호랑이는 살아있다' 이상의 강한 음성으로 자신의 예술적 성취와 미술사적 위상을 확인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김홍희 <쌈지스페이스 관장.미술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